서울대학교 사회운동의 길 걷기




산책을 시작하며


­ 학내 열사들의 추모비를 이은 ‘민주화의 길’은 1987년 6월 항쟁 20주년인 2007년에 기획되어 2009년에 공개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민주화’의 서사는 ‘민주주의의 제도화’에 초점이 밎추어진 나머지 대학과 일터에서 민주주의가 여전히 부재하며 그렇기에 ‘민주화’가 생활세계 속에 계속 이어져야 함을 가리기도 했습니다. 동시에 ‘민주화’ 서사가 체제내로 제도화되며 포섭과 배제의 논리가 작동하는 가운데, 일부 열사 추모 공간은 공식적인 ‘민주화의 길’의 기억과 기념에 포함되지 못하고 비가시화되기도 합니다.

­ 오늘날 노동권과 인권, 대학사회 민주주의, 반전평화, 국가폭력 반대 등 다양한 권리의제에서 활동하는 학생들에게, 60년부터 80년대 후반까지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에서 끊이지 않아온 ‘열사’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권리와 민주주의를 확장하고 심화해온 사회운동의 급진적인 전통이 제도화된 기념물에 갇히지 않고 오늘날의 의미로 소환될 수 있도록, 우리 주변의 공간에 놓인 기억의 길을 다시 걸어보고 또 이야기해보아요.

인문대학


박종철 열사 추모비


­ 1987년 6월 항쟁을 정점으로 기억하는 한국의 ‘민주화’ 서사에서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의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후에는 당시의 죽음들을 국가폭력과 인권침해로 기억하기 위한 일련의 흐름 속에서도 중요한 사건이자 기억으로 소환되고 있습니다. 그의 죽음 이후 부친 박정기 선생님과 모친 정차순 선생님의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활동은 한국의 사회운동에서 유가족 운동의 중요한 역할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을 개조한 민주화운동기념관(구 민주인권기념관), 그리고 최근 대학동 녹두거리의 박종철 하숙집 자리에 세워진 박종철기념관을 다녀오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박종철 열사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그의 삶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국가폭력의 무력한 희생자가 아니라 능동적인 사회운동의 참여자로서 그의 삶을 조명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1985년 6월 전두환 정권 하에서 침체되어 있었던 급진적 노동자운동의 부활을 알린 구로동맹파업 당시 가리봉동 오거리 투쟁(가오리 투쟁)으로 구류를 살게 된 박종철 열사는 그해 여름 공활(공장 활동)을 경험한 이후 86년 4월에는 청계피복노조 합법화 쟁취 투쟁에 참여하다 여러 달 동안 구속되기도 했습니다. 청피노조는 전태일 열사의 죽음 이후 평화시장에서 설립된 섬유산업 등 여성 경공업 노동자 중심의 민주노조로, 한국 민주노조 운동의 부흥을 주도했으나 1980년 이후 불법화되었습니다. 새로운 세대의 급진화된 학생운동과 노동자운동이 결합하여 80년 6월과 7, 8, 9월 노동자 대투쟁을 예고하던 시기의 활동들에서 박종철 열사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최우혁 열사 추모비


 학생운동 활동 중 육군에 입대한 최우혁 열사는 1987년 9월 군내 쓰레기 소각장에서 불에 탄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경위가 아직도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그의 죽음은 당시 군이 조직적으로 학생운동 참가자의 ‘전향’을 강압 및 유도하고 이들을 이후 ‘프락치’로 활용하고자 했던 ‘녹화사업’의 배경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습니다. 군내 인권침해와 의문사에 대해서는 향후 다른 열사들과 함께 설명드리고자 합니다.

김세진・이재호 열사 추모비


­ 1986년 4월 28일 신림사거리에서 벌어진 김세진 열사이재호 열사의 분신은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당시 학원가는 전방입소 거부투쟁의 물결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1980년 광주 5월 항쟁에 대한 신군부의 진압을 미국이 용인한 것에 대한 반발로 1985년 5월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을 비롯해 반미적인 정서가 고조되었고, 이는 80년대 내내 이어진 대학 내의 병영화와 군사주의적 통제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발과 결합되었습니다. 70년대 교련 교육에 대한 반대 이후 80년대에는 문무대 훈련과 전방입소에 대한 거부가 주되게 표출되었습니다. 이러한 학생운동은 지배세력과 저항세력 모두 공유하던 민족주의적인 지반 위에서 강한 통일 지향의 반전평화운동을 형성했고, 전방입소 거부투쟁은 군사주의적 동원에 대한 반발일 뿐 아니라 ‘용병교육’을 통한 전쟁 위기 고조를 막아내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경찰의 무력 진압 속에서 두 열사는 분신으로 저항의 의지를 표출했습니다.

 미국의 핵자산 전개에 반발하는 의미를 지녔던 열사의 ‘반전반핵’ 구호는 오늘날 동아시아 전역에, 그리고 지구적으로도 꾸준히 핵확산이 이루어진 오늘, 한편에서는 북핵이 중요한 위협으로 떠오르는 한편 남한의 핵무장을 찬성하는 주장이 대중적인 공감대를 얻고 있는 지금 허망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동시에 당대에는 전사회적으로 공유되었던 민족주의에 대한 견해가 다변화된 오늘 과거 통일운동의 지향을 어떻게 평가하고 또 이어나갈 것인지에 대해서도 다양한 의견이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집단학살과 중동 지역 확전이 심화하고 있는 현실은 반전평화운동이 오늘날에도 매우 시급하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특히 오늘날 한국의 방산기업과 ‘K-방위산업 수출’을 자랑하는 무기박람회에 대한 사회운동의 능동적인 저항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진영론을 넘어서 국제적인 분쟁과 갈등의 진영 어디에 있든 각자가 놓인 조건에서 전쟁위기 고조와 대중 생존권 악화를 야기하는 군비증강에 대해 문제의식을 나누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박혜정 열사 추모비


­ 한국의 사회운동은 억압적 체제에 대한 저항의 양태로서 외부를 향한 무장투쟁보다 내부를 향한 자기희생적 분신을 자주 표현해온 역사적 특이성을 보입니다. 폭력을 다루는 이러한 특이성이 다른 형태의 저항운동보다 꼭 더 윤리적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러한 특이성은 분신과 죽음으로 누군가가 내몰린 이후 이에 대한 주변의 큰 도덕적 자책감을 불러일으켰고, 그해 5월 21일 한강에 투신한 박혜정 열사의 죽음은 그런 죄책감의 표현이었습니다. 박혜정 열사의 추모비에는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뜻에 따라 ‘학형’이라는 호칭이 쓰여 있습니다. ‘열사’라는 호칭의 역사성이 지니는 의미 뿐 아니라, 누군가를 ‘열사’로 호명하거나 혹은 하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인, 그리고 주변적인 관심의 차이가 기억의 위계화를 초래하거나 다양한 맥락을 지우지 않는지에 대해서 더욱 섬세하게 바라보아야 할 필요성을 보여줍니다.

자연과학대학


조정식 열사 추모비


­ 조정식 열사는 1989년 5월 24일 수도권에 밀집했던 저임금 영세 사업장에서 산업재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학교에서 제적당한 이후 ‘학출’로서 노동자로 ‘존재 이전’을 했던 많은 학생운동가의 경로를 조정식 열사도 밟았습니다.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이 거센 탄압으로 수면 밑에 침잠했던 가운데 80년대 급진적 노동자운동이 부활한 데에는 이처럼 학생운동의 현장 투신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인 ‘학출’의 진출이 대중을 지도하는 위계적 지식인상을 함의하는 것은 아니며, 급진적 정치담론과 노동현장 요구의 상호적인 영향을 전제하고 또 지향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당시 한국 자본주의 축적체제의 고도화 과정 속에서 70년대 주로 종교적 사회운동의 지원을 받은 여성 경공업 노동계급은 축소되거나 주변화된 한편 주로 새롭게 형성되는 중공업 남성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노동운동 및 ‘학출’ 서사의 기억이 재생산되기도 했습니다.

 정치적 노동자운동을 지향하던 그룹의 일제검거로 감옥살이를 했던 조정식은 출소 후 얼마되지 않아 산재로 숨지게 되었습니다. 일터에서의 존엄과 민주적 권리를 위해 투쟁한 노동자운동은 노동자계급이 정치적 민주화의 주된 추동 세력이라는 점에서 보아도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흐름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민주화’ 서사만큼 우리가 일터에서의 생명권과 건강권, 그리고 노동안전 운동을 이어가는 맥락에서 열사의 삶과 죽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태안화력발전소 하청노동자로서 문재인 정권에 비정규직 정규직화의 약속을 이행하라고 촉구하는 사진을 남긴 김용균 열사가 얼마 후 위험의 외주화 속 산재로 숨진 현실은 오늘날에도 산재 피해자와 유족을 피동적인 위치에 두는 통념에 날카롭게 문제를 제기합니다. 일터에서의 생명과 안전은 그 자체로 일터를 둘러싼 조건에 대한 노동자의 민주적인 의사결정 개입과 통제를 요구하는 권리이기에, 노동조건에 대해 전제적 규율이 여전히 지배적인 지금 매우 ‘정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위험이 더욱 극심하지만 법제도의 보호에서도 사각지대로 내몰려 비가시화된 작은 영세 사업장 노동안전 등을 어떻게 가시화하고 또 사회적 의제로서 ‘정치적’인 해결을 도모할 수 있을지 고민이 더욱 필요합니다.

조성만 열사 추모비


­ 1988년 5월 5・18 8주기를 앞두고 명동성당에서 투신한 조성만 열사는 한국에서 종교와 사회운동의 관련성을 잘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가톨릭노동청년회와 가톨릭농민회, 도시산업선교회 등 가톨릭교와 개신교의 다양한 급진적 경향과 조직체들은 반공주의적 권위주의하에서 세속적인 대안과 체제에 대한 비판이 금기시되던 조건 속에서 노동자운동과 농민운동 및 도시빈민운동 등이 1970년대에 조직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동시에 세속적인 차원에서는 레드콤플렉스의 대상이 손쉽게 되었던 통일 지향의 80년대 평화운동에 있어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합니다. 분단 상황에서 발생해온 정치범 양심수 석방, 88올림픽 남북 공동 개최 등을 주장하며 사망한 조성만 열사는 가톨릭 신앙운동을 배경으로 민족 및 통일 담론을 내면화했으며, 라틴아메리카에서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종교적 담론의 전용의 사회운동적 사례를 보여줍니다.

황정하 열사 추모비


 1983년 11월 8일, 레이건 미 대통령 방한에 대한 반대가 대학가에 고조되는 가운데 중앙도서관 벽에 밧줄로 매달린 채 유인물을 배포하던 황정하 열사는 경찰의 검거 작전 중에 떨어져 사망했습니다. 유인물을 배포하거나 구호를 외치기만 하면 곧바로 행동이 봉쇄되는 엄혹한 조건에서 잠시나마 목소리를 전하기 위해 진행한 방식의 시위였습니다. 극한적인 조건에서 극한적인 저항의 방식으로 내몰리고 그 과정에서 비극이 일어나는 과정은 21세기에도 쌍용차 정리하고 반대 점거 파업에서, 철거민들과 진압 경찰이 사망한 용산 참사에서 되풀이됐습니다.

농업생명과학대학


김상진 열사 추모비


­ 1975년 4월 11일 서울대 농과대학 수원캠퍼스에서 집회 중 할복한 김상진 열사의 죽음은 1970년 유신 체제의 성립 이후 긴급조치와 공안사건으로 얼어붙었던 사회적 분위기를 뒤흔들었습니다. 유신체제에 대한 학생들의 광범위한 반발은 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공안탄압, 그리고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한 조작과 사형 집행으로 급속하게 사그라들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김상진 열사가 ‘양심선언문’과 대통령을 향한 ‘공개장’을 남기고 사망하자, 사실상 각 학교 단위의 소규모 시위 이상의 저항을 조직하기 어려웠던 조건에서도 그를 추모하기 위한 대규모의 연합 시위가 기획되었습니다.

 김상진 열사의 사망의 계기로 시작된 522 사건(오둘둘 사건)은 서울대 내에서 다양한 학교의 학생들이 참여했으며, 탄압을 최소화하기 위해 문화적인 형식을 채택했습니다. 박정희 정권도, 당시의 학생사회도, ‘민족’에 대한 탐색 속에서 민속문화를 재발굴하고 재발명하는 방식을 취했기에, 오둘둘 시위는 풍물과 시 낭송을 둘러싼 민속적인 진혼굿과 추모제의 형식을 채택했습니다. 그럼에도 당시 베트남 전쟁의 종전을 배경으로 유신 정권이 긴급조치 9호를 통해 광범위한 억압적 법제를 수립한 상황이었기에, 오둘둘 시위의 조직자들은 상당한 처벌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김상진 열사의 사망과 오둘둘 사건은 학생운동이 이전의 엘리트주의에서 벗어나 강한 민중 지향성을 채택하는 데에, 그리고 그 과정에서 ‘민중문화’를 모색하며 문화적 저항을 주된 투쟁의 양식으로 채택하는 데에 주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동수 열사 추모비


­ 1986년 5월 20일 학생회관에서 이동수 열사가 분신 투신했을 때, 그의 죽음은 ‘비운동권의 죽음’으로 다루어졌습니다. 당시의 학생운동을 특징지은 ‘운동권’ 조직과의 연계가 없는 인물의 죽음이었기에, 그와 박혜정 열사의 죽음은 그만큼 특이하고 또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군내 부정투표에 대한 반대, 학생사회 내 권위주의적 위계 문화에 대한 반대에서부터 학생 시위에의 자발적인 참여 등은 주어진 조건에서 다양한 모순을 직면한 개인이 자유와 존엄을 위해 선택한 투쟁을, 추상적인 열사의 ‘상’을 넘어 보여주었습니다.

사회과학대학


4・19 기념탑


­ 1960년 이승만 권위주의 정권의 붕괴를 초래한 4・19혁명은 오랫동안 ‘학생혁명’으로 호명되어왔습니다. 우리가 익숙한 혁명 서사와 기억 또한 대학생을 혁명의 주체로 전제하고 있습니다. 물론 대학생들의 주도적인 참여가 혁명을 성공으로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특히 수도권 지역에서 경찰이 발포로 대응하면서 여러 대학 참가자들은 많은 인명 희생을 치러야 했습니다. 고순자(미대), 김치호(문리대), 박동훈(법대), 손중근(사범대), 유재식(사범대), 안승준(상대) 등 6인의 서울대 열사가 혁명 과정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4・19혁명은 대학생만의 혁명은 아니었습니다. 4・19혁명의 전초가 될 대구에서의 2・28 항쟁이나 3・15 부정선거에 항의한 마산의 의거는 고등학생을 비롯한 청소년들의 주도로 진행됐습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고등학생들이 자유당 정권에 의해 위로부터 조직된 학도호국단 체제를 통해 학교의 담장을 넘어 조직화되어 있었고, 동시에 각종 ‘반공데모’를 통한 관제 동원을 통해 가두에서의 행동에 상당히 익숙했기 때문입니다. 위로부터의 동원을 통해 학습된 조직과 행동은 자생적인 분노 속에서 쉽게 아래로부터의 반란으로 전유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서울에서도 대학생의 참여는 고려대의 4.18 의거와 다른 학생들의 4・19 봉기로 청소년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었습니다. 한편 국가기구의 폭력적 억압이 더욱 극단화하고 혁명이 더욱 급진화하면서 1960년대 도시화 속에 양산된 도시빈민이 주된 혁명의 주도세력으로 부상했습니다. 넝마주이와 노점상, 구두닦이 등을 비롯해 경제의 비공식부문에서 생계를 조달했던 도시빈민들은 업종별로 자신들의 네트워크와 조직망을 갖추고 있었으며, 혁명의 급진화에 더우 과감하게 뛰어들며 경찰서를 접수하여 무장하고 진압에 응수하는 등의 저항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를 냈지만, 이들의 죽음은 대학생의 죽음에 비해 유의미하게 기억되고 있지 않습니다.

 한편 대통령의 하야 이후 대학생이 혁명의 주도세력으로 호명되었던 것은 진학률이 높지 않았던 당시 대학생이 지닌 사회적 엘리트 계층으로서의 지위와 이에 대한 사회적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청소년은 다시 학교로 돌아갈 것이 요구되었고, 도시빈민의 행동은 과격함과 위험한 요소로 간주되어 중산층의 경외시와 기피에 직면한 가운데, “수습의 길은 대학생에 있다”는 구호가 사회적으로 대두했습니다. 당시 대학생들은 혁명의 급진화보다 새로 들어설 정부를 위해 치안을 관리하는 등의 역할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했고, 혁명 이후에 대학생의 주축으로 진행된 농촌계몽운동이나 신생활운동도 계몽적인 엘리트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4・19혁명 이후 오랫동안 탄압되었던 진보적 사회운동이 부흥하며 각종 민주노조운동과 한국전쟁 당시 피학살자 유가족 운동, 그리고 특히 통일과 평화를 능동적으로 지향하던 혁신정당과 혁신계 정치운동이 대두하였지만, 이러한 사회운동과 학생운동의 결합은 자연스럽지 않았으며 많은 모순을 내보였습니다. 엘리트로서 ‘순수성’은 4・19혁명에서 대학생에게 그토록 힘을 실어준 동력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 역할을 한계지은 족쇄이기도 했던 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대에서 4・19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많은 인물이 향후 국민국가 만들기와 산업화를 추동하는 민족주의적 엘리트로 스스로의 역할을 규정하며 보수화된 것은 이상한 일만은 아닙니다. 이러한 학생 위치에 대한 엘리트주의적 인식이 사회운동에서 극복되기 위해서는 10년 이상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오늘날 본부점거에 대한 물대포 진압 등 억압적인 관행을 내보인 전 총장이 참여한 학내 4・19 추모식에서 진압에 항의하던 학생들이 끌려나갔던 2017년 봄의 일은, 우리가 어떤 민주를 지향할지 상이한 기억이 충돌하는 장을 보여줍니다.

민족민주열사 희생자 기념식수


­ 4・19 공원 아래 순환도로 길가에 위치한 추모식수는 공식적으로 ‘서울대 민주화의 길’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공식적인 ‘민주열사’의 장에 여러 이유로 포함되지 못하거나 때로는 불온시되어 가려진 기억들임에도 불구하고, 서울대와 관계를 맺었던 사회운동 활동가들과 열사들의 삶과 죽음은 기억되어야 할 가치가 있습니다.

 안치웅 열사(정의의 나무)는 1982년 학부생으로 민주화추진위원회에서 활동하며 급진적 노동자운동의 부활을 알린 1985년 구로동맹파업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다 감옥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출옥과 복학 이후 1988년 국가기구의 감시와 사찰을 받다 강제실종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강제실종은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군부독재가 체제에 저항적인 활동가에 대해 가한 폭력의 양식이었습니다.

 권재혁 열사(민주의 나무)는 서울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열사 중 드물게 1960년대에 급진적 사회운동에 종사하다 죽임을 당한 인물입니다. 그는 서울대 졸업 이후 1950년대 후반 미국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귀국한 촉망받는 연구자였으며, 세계체제 내에서 한국의 위치를 중심으로 1960년대를 팽배했던 ‘자립적 경제’의 문제에 매달렸습니다. 1963년 한일협정에 반대하여 일어난 6.3 항쟁 이후 권재혁 열사는 중앙정보부의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으로 조작되어 탄압당하고 1969년 11월 4일 사형 집행으로 법살당하고 말았습니다. 반공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변혁적인 사회운동이 뿌리내리기 어려운 60년대의 조건에서 권재혁 열사가 수행한 일련의 학문적이고 활동적인 기여는 향후 한국 사회운동의 전개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신향식 열사(통일의 나무)는 서울대 졸업 이후 노동자운동에 종사하다 70년대 유신 체제의 모순이 격화하는 가운데 1976년 결성된 남민전에 핵심적인 인물로 참여했습니다. 남민전은 지금까지도 논쟁적인 조직운동으로, 유신체제에 대해 저항하고 이를 준비하기 위한 재원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도시 게릴라 방식의 무장투쟁 노선을 채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거 공안당국의 주장과는 달리 남민전은 북한과 연계되지 않은 자생적인 사회운동 그룹이었으며, ‘인혁당 재건위’ 사건 조작과 사형 집행을 비롯하여 극한적 조건이 강요되는 데 대한 분노로 논쟁적이고 극단적인 방식을 저항의 수단으로 채택했습니다. 라틴아메리카나 동남아시아, 북아프리카 등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도시 게릴라 방식의 투쟁이 당시의 조건에서 불가피하다고 보아 남민전에 참여했던 인물로는 광주 출신의 시인으로 유명한 김남주, 남민전 사건에 연루된 이후 ‘파리의 택시운전사’로 오랫동안 망명 생활을 하다 귀국한 후 문필가이자 원로로 많은 영향을 남긴 홍세화 등이 있습니다. 1979년 일제검거로 무너졌고, 신향석 열사는 1982년 사형이 집행되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김용원 열사(민족의 나무)는 4・19혁명을 전후한 시기 서울대 내에서 혁신계 및 통일운동과 깊이 관련된 학생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졸업 이후 중고등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던 그는 1963년 6.3 항쟁이 학생 사이에 대규모로 분출한 이후 이에 대한 진압과정에서 혁신계 사회운동 인사들을 ‘인혁당’으로 몰아 조작한 ‘1차 인혁당’ 사건으로 체포되었습니다. 이후에도 계속 교사 생활을 하다 10년이 지난 1974년 유신체제 하에서 갑작스럽게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조작되며 다시 체포되었고, 1975년 4월 8일 사형이 확정된 바로 다음날인 9일 새벽 사형당했습니다. 과거 혁신계 사회운동에 종사했던 선배 그룹이 ‘인혁당 재건’을 통해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민청학련’의 학생 시위를 사주하고 조종했다고 조작함으로써 유신체제 공고화의 정당화 기제를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8인의 사형수가 죽임을 당한 이날을 스위스의 국제법학자협회는 사법 역사상 암흑의 날로 선언했고, 국제앰네스티에서도 강력한 규탄을 제기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법적 조작사건인 인혁당 및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많은 개인의 삶을 파괴했으며, 고문과 사형제가 국가폭력의 수단으로 사용된 어두운 역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본명이 이종배였던 이상배 열사(자주의 나무)는 서울대 졸업 이후 제일은행에서 은행원으로 근무하던 중 ‘1차 인혁당’ 사건에 연루됩니다. 중앙정보부에서 가혹한 고문 끝에 투신하여 중증장애인이 된 그는 그 후유증으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조작되기 전 1970년 자살로 세상을 떠납니다.

 서울대 가톨릭학생회와 가톨릭노동청년회 등 가톨릭 사회운동에 종사하던 한희철 열사(염원의 나무)는 군 징집 이후 군 보안사에 연행되어 전향을 강요하는 폭력적 ‘녹화사업’의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1983년 12월 11일, 이러한 국가폭력 속에서 군내에서 총상을 입고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았습니다. 김용권 열사(해방의 나무)는 노동권과 관련된 학생운동에 참여하던 중 입대하였으나, 군내에서 보안사의 ‘프락치’ 강요 및 동료의 행방을 찾기 위한 가혹행위 속에서 1987년 2월 20일 군내 의문사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산책을 마치며


 16동 사회과학대학 본관 뒤편에 김태훈・우종원・김성수 열사들의 추모비도 있지만, 사회대 본관이 현재 재건축 공사 중이라 접근이 어려운 상황입니다. 해서 시간과 동선 관계상 오늘 행사는 여기서 해산하도록 하겠습니다.

 ‘민주화’의 길이 점점 잊혀가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민주화’라는 서사로만 담을 수 없는 다양한 사회운동 역사 속 주체들과 의제들의 이야기도 공간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번 기행이 다양한 권리 의제의 맥락에서 캠퍼스를 함께 걸으며 기억의 공간을 새로이 되짚어보는 시간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4・19혁명 속 대학생에 가려진 주체들에 대해, ‘민주화’의 박제화 속에 숨겨진 ‘열사’들의 노학연대와 노동운동에 대해, 제도화된 기념 공간에서 불온시되어 배제된 국가폭력 사건들에 대해, 과거의 반전평화운동과 군내인권운동을 어떻게 오늘날의 맥락에서 새롭게 소환할 것인가에 대해, 기억의 비가시화와 위계화를 극복하며 돌아보는 장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변에 놓인 기억의 길, 앞으로도 늘 그 기억을 새롭게 다시 활성화하며 나아가는 가운데 권리의제와 사회운동이 성찰과 영감의 원천을 역사적 기억에서 찾을 수 있기를 바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