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성명: 투표용지 부족 사태로 민주주의를 되돌아보다
2026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와 학생사회의 대응에 부쳐
지난 6월 3일 진행된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일부 투표소의 투표 용지가 부족하여 유권자가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현재 발표된 바에 따르면 선거 당일 투표용지가 부족했던 투표소는 전국 91곳이고, 용지 부족으로 인해 투표가 일시 중단되었던 투표소는 26곳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본투표의 투표용지 인쇄 수량 하한선을 선거구 내 전체 유권자 수의 50%로 책정했다. 이는 작년 대선의 60%보다 낮은 수치이다. 투표용지가 부족했던 투표소 현장에서도 오전부터 용지 부족이 예상되었지만, 유연한 대처가 미비했다. 미사용된 투표용지를 반출하는 과정에서 촉발될 논란을 피하기 위해 용지 인쇄 하한을 의도적으로 낮게 잡았다고 추정되지만, 이로 인한 시민들의 참정권 침해가 한층 더 심각한 문제임은 변하지 않는다. 이번 사태에서 선관위의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라는 주장은 민주시민으로서의 정당한 의견 표출이다.
이번 사태는 시민들의 참정권이 얼마나 쉽게 침해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이번 사태로 인해 한 표를 행사하기 위해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던 사람들의 분노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전국 대학교 총학생회는 성명문을 발표하고 시국선언을 예고했다. 서울대학교 연석회의는 성명과 시국선언에서 선관위의 무능을 규탄하면서 6월 민주항쟁의 열사들을 거론했다. 동시에, “작금의 상황은 결코 정쟁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대학생과 청년의 순수한 목소리"를 반영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이번 사태 이전부터 참정권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소외되어 온 사람들, 참정권을 행사하는 것 자체가 ‘정쟁의 대상'이 되어 온 사람들을 떠올린다. 이번 선거에서도 근로기준법을 적용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은 법정공휴일인 본투표일에도 쉴 수 없었다. 장애인들은 후보자 공약을 비롯한 선거 정보를 제공받기 어렵고, 선거 당일에도 투표소의 접근성 부족과 장애 입증의 난관으로 인해 투표가 지연되거나, 빈 용지를 내고 나오는 일도 허다하다. 홈리스는 거주불명자로 분류되어 대부분 자신의 지역에서 투표할 방법을 알지 못한다. 아울러, 참정권을 행사할 수 없는 이주민, 교육감을 직접 뽑을 수 없는 청소년의 참정권은 어디로 갔는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정치이다. 무엇을 민주주의로 정의하는지, 언제 민주주의가 침해되었다고 여기는지, 언제, 그리고 어떻게 분노하는지는 그 사람의 정치성을 드러낸다. 그렇기 때문에 이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되는 사안일지라도 이에 대한 반응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정치성을 지우려는 시도는 어떤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고 어떤 문제를 주변으로 밀어낼 것인가에 대한 또 다른 정치적 선택이 된다.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자들이 이번 사태를 기회로 삼아 다시금 세력 확장을 시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의 행보는 분명히 문제적이고, 여러 총학생회들이 이들을 우려하여 “순수한 목소리”를 강조하게 된 배경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데에만 매몰된다면, 사태의 논점을 흐리는 이들의 주장을 공론장의 중심으로 끌어들이게 된다.
이번 사태를 둘러싼 논의는 선거 관리의 강화와 더불어 전면적인 참정권 확대로 나아가야 한다. 대부분의 총학생회들이 이번 사태를 대응하는 데 있어 탈정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지만,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참정권과 민주주의를 말하는 대자보가 전국 각지의 캠퍼스에 부착되고 있다. 지금까지 투표권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배제된 사람들, 나아가 참정권 자체가 끊임없이 논란의 대상이 되어 온 사람들까지 누구나 안정적으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실질적 기반이 마련되어야 한다. 본투표에 쉬지 못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사전투표를 확대하고, 장애인들의 선거 접근성을 보장하고, 공정한 선거와 선관위 노동자들의 과부하를 줄이기 위해 선거 행정의 구조적 문제를 개혁하고 인력을 확충해야 한다. 모두의 참정권이 온전히 보장되고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그날까지, 우리는 모든 억압받는 자들과 연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