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노동절 맞이 합동세미나: ‘그들의 노동절, 우리의 노동절: 첫 공휴일이 된 세계노동절을 맞는 마음에 대하여’


노동절에 대하여


노동절이란 무엇인가?


 노동절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노동자들의 날입니다. 사람들의 많은 수가 노동자이고, 노동자의 대다수가 한국에서는 주5일 동안 근무를 하고, 누군가의 휴일에도 다른 노동자들은 노동자로서 근무하고 있을 터인데, 왜 굳이 어떤 날을 노동자를 위한 날로 기념하는 것일까요? 어떤 날도 노동자가 없는 날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이런 모든 노동의 날들을 자신의 날로 지닐 수는 없습니다. 자본에 의한 타율 속에서, 임금을 위하여 자신의 노동력을 팔며 지내게 됩니다. 따라서 노동절이란 노동자들의 권익 신장을 위한 시위, 투쟁의 날로서 노동자들이 일상적인 일터 속에서 이야기하지 못했을 것들, 내지 못했을 목소리들을 낼 수 있도록 하는 날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노동절은 언제 시작되었을까요? 노동절은 여러 국가의 노동조합과 사회주의 정당들의 연합체인 제2인터내셔널에 의해서 1889년에 ‘세계 노동자계급의 국제적인 시위, 투쟁의 날’로서 제정되고 1890년 5월 1일부터 기념되었습니다. 5월 1일이라는 날짜는 이보다 4년 앞선 미국에서의 파업투쟁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노동절의 기원: 헤이마켓 사건


 19세기 후반 시카고는 수많은 이민자들과 자본이 모이는 도시로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에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노동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서 노동자 조직을 구성하고자 시도하였고, 8시간 노동제의 제정을 요구하고자 했습니다. 1886년 5월 1일의 시위는 이러한 요구를 관철하기 위하여 여러 노동자 조직들이 연합하여 진행한 시위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경찰들은 노동자들의 시위에 대해서 해산을 요구하며, 폭력적 진압을 시도하였고 시위대와 경찰 간의 마찰 끝에 사상자가 발생했고, 시위 주동자들에 대해서는 폭동죄를 명목으로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특히나 5월 4일 있었던 헤이마켓 광장에서의 폭력적 진압과 이에 대한 몇 아나키스트들의 대응이 이러한 사형 선고의 근거로 뽑히지만, 이는 명백한 오심으로서 사회주의적, 아나키즘적 지향을 지닌 노동조합 운동가들에 대한 탄압을 목표로 삼았었다는 점이 명백합니다. 이런 사법살인에 의한 노동운동 탄압은 이후에도 1920년의 사코와 반제티 시간과 같은 사례에서도 반복되었습니다. 이런 ‘법치’라는 이념 하에서도 지속되는 노동운동의 탄압은 노동절을 위한 투쟁이 가지는 성격을 우리에게 더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한국에서의 노동절 : 오랜 왜곡의 세월


 한국에서도 노동절은 오래전부터 의미를 지녀왔습니다. 노동자계급들의 조직화가 구체화되기 시작한 1920년대부터 식민지 조선의 노동자들은 ‘메이데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절을 기념해왔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전평’이라고 불리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가 출범함에 따라서 1946년 5월 1일 20만명이 참가하는 큰 행사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전평에 대응하는 통치세력과 자본가들에 의하여 조직된 관제노조는 전평과 대립하였고, 탄압이 심화되며 다시 노동자들의 ‘메이데이’는 기습시위의 형태로만 나타나게 됩니다. 남한 정부 수립 이후에는 어용단체인 대한노총의 주도 하에서 노동절 행사가 국가 찬양을 위한 행사로 진행되기 시작하였고, 1959년에는 날짜마저도 변경해서 3월 10일에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군부 시기에도 마찬가지로 노동절은 ‘노동’이라는 이름마저도 상실하고 ‘근로자의 날’로서 변화되었습니다.

 즉, 노동절은 그 세계적 차원에서의 의미에서 유리되어서 사회의 한 부속으로서의 노동자들이 그 자신으로서 나타나는 장이 아니라 사회의 질서를 옹호하기 위한 도구로서 동원되는 행사로서의 왜곡된 의미를 지닌 채로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박정희 체제 하에서의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고도화는 노동자들을 창출했고 이에 점차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투쟁이 나타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신군부 시절에 이르러서 노동 운동이 급진화되며 1985년 5월 1일 노동자들에 의한 노동절 기념이 가시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정부는 여전히 이러한 노동자들의 움직임에 대해서 억압하고자 하였지만, 노동자들은 지속해서 집회를 열고 형식적 민주화 이후 1988년에는 공개적으로 노동절 기념 행사를 진행하였습니다.

 하지만 새로이 집권한 노태우 정권 또한 노동절 기념 행사를 용인하지 않고자 하였고, 이에 노동자와 학생들은 노동절 이전부터 투쟁을 통해서 노동절 기념 행사를 준비하고,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공개적으로 내고자 시도하였습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4.30 행사는 이러한 노동절 전야의 투쟁으로부터 기원을 갖는 행사로서, 한국 사회에서 노동절이 억압되어온 역사, 노동자 운동이 왜곡되어온 역사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아직도 노동절이 제 이름을 찾지 못하고, 1994년부터 국가에 의해서는 ‘근로자의 날’로 불려왔었던 역사와도 조응합니다. 마침내 작년에 근로자의 날을 노동절로 개칭하고, 기념하기로 하면서 다시 이름을 되찾게 되었지만 우리 사회에 산재하고 있는 노동 억압의 모습들은 이런 이름의 획득만이 아니라 노동 해방을 위한 투쟁의 지속이 필요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에 여전히 학생의 입장에서도 노동절 전야제를 통해서 우리 사회의 노동운동의 역사성과 노동의 현실을 기억하고, 노동절을 맞이하여 사회의 노동 현실에 대해서 이해하고 이야기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보론: 8시간 노동 투쟁


 헤이마켓 투쟁은 1850년대부터 이어져온 8시간 노동을 요구하는 노동 운동의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8시간 노동 투쟁은 다른 여러 국가에서도 이뤄졌습니다. 그렇다면 이 8시간 투쟁은 무엇을 요구하는 것일까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임금 노동자들이 출현합니다. 임금 노동자들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하고,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서 임금을 받음으로 생활하는 이들입니다. 노동력은 시간 단위로 판매되지만 노동자의 신체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 것으로서, 자연적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노동자는 다음날의 출근과 인간적인 생활의 보장을 위해서 적정 수준의 노동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이와는 달리 자본의 입장에서는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을 최대한 증진시키려고 하는바, 노동시간을 둘러싸고 노동자들과 자본가들 사이에는 마찰이 발생하게 됩니다. 하지만 개별 노동자들은 이 노동 시간에 대해서 자신의 뜻대로 조정할 수 없습니다. 또한 개별 기업에 대해서만 노동 시간의 단축을 요구하게 된다면,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다른 기업과의 경쟁에 있어서 그 자신의 존립 기반을 위협하는 것으로서 나타나게 됩니다. 노동 조건은 자본간의 경쟁 하에서 표준화되기 떄문입니다. 따라서 노동자들의 투쟁, 요구는 노동조건의 표준에 대한 조정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8시간 노동 투쟁의 기반은 바로 이러한 자본주의 하에서의 노동 시간의 표준화 경향에 근거해있습니다.

세계 노동운동의 역사


 세계 노동운동의 역사는 워낙 방대한 분야이기 떄문에 그 전 영역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 자리에서는 노동운동의 대표적인 형태를 구성하고 보여주는 몇 사례와 분기점들을 중심으로 세계 노동운동의 흐름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려고 합니다. 노동운동은 크게 노동조합 운동과 노동자 계급의 당 운동으로 구성된다고 이야기됩니다. 하지만 이 둘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긴밀한 연관 관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나 노동조합에 대한 협소한 정의가 노동조합을 단순한 일상적 투쟁의 조직으로서만 이해하는 것과는 달리 많은 노동조합들은 정치적인 목적을 겸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노동운동의 역사는 오히려 노동운동이 단순한 ‘경제투쟁’에 그치지 않고 노동자 계급이라는 근대 사회의 새로이 등장한 계급이자, 이 사회의 몸이자, 뼈대가 되는 이들의 정치성 획득을 위한 과정으로도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노동자의 등장과 노동운동의 등장


 노동운동의 출현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정착 속에서 임금 노동자가 출현하면서 시작됩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우리는 여러 농민 봉기나 피지배계급의 봉기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들 또한 노동하는 인간이었지만, 근대적 의미에서의 노동자와는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자는 봉건 시대의 소작농이나 농노와는 달리 신본적 예속에서 벗어나서 자본가와 계약을 맺을 ‘자유’를 지니면서 동시에 생산수단으로부터 ‘자유’로운 이중의 자유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동자의 형성을 위해서는 생산수단으로부터 축출하고, 생산수단의 소유자, 부르주아들이 자본주의적 경영을 위한 자본금을 지니게 되는 시초축적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즉, 자본의 탄생과 더불어서 임금노동자 예비군의 탄생을 발생시키는 과정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정착에 앞서서 이뤄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마르크스는 자본의 탄생은 모든 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면서 이뤄지게 된다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이는 노동자들에게 그리고 이전부터 이어져온 수공업 노동자들에게 점차 더 가혹한 근무 환경을 요구하는 형태로 나아가게 됩니다. 흔히 단순히 기술에 의하여 도태된 이들에 의한 ‘기계파괴 운동’으로서 독해되고는 하는 19세기 초반 영국의 러다이트 운동은 이러한 ‘자유로운’ 노동자의 정립 과정에서 고전적인 숙련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생존권을 보호하기 위한 시도를 보여준 것으로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노동자들에게 저임금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받아들이기를 강제하는 자본의 시도에 대해서 저항하려고 하는 시도로서 기계를 파괴함으로 노동조건을 개선하고자 한 시도였던 것입니다. 또한 이는 1799년의 단결금지법으로 금지된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을 위한 전술적 성격 또한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함께 오언을 비롯한 초창기 사회주의자들의 유토피아적 공동체 구성 실험들이 있었습니다. 이는 후일 1844년 로치데일 협동조합의 건설로도 이어지는 노동자들의 빈곤화 경향에 대항해서 대안적인 사회 공동체를 구성하려는 시도로서, 노동조합 운동과 함께 구성되었습니다.

 한편 유럽 대륙, 특히나 프랑스의 부르주아 혁명, 시민 혁명 속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은 다른 양상을 지니고 나타나게 됩니다. 특히나 상퀼로트로 대표되는 프랑스 대혁명의 물리력을 담당한 도시 빈민 계층, 노동자 계층은 표면에 드러나는 자유주의적 이상과 동시에 이를 넘어서는 개혁의 구상을 품고서 혁명에 동참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직 이들의 목소리는 독자적인 언어의 형태를 빌리기 보다는 부르주아들의 혁명적 언어를 빌려서 구성되는 측면이 두드러집니다. 이는 1830년 프랑스 7월 혁명에서도 마찬가지로 반복되게 됩니다. 즉, 19세기 초반 산업 사회의 형성, 확대기 동안 노동운동은 그 자신의 독자적인 언어를 구성하지 못하였지만, 노동자라는 새로이 등장한 이들은 사회 변혁의 동력으로서 동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 노동자의 정치 참여를 위한 시도


 차티스트 운동은 1830년대 후반 영국에서 조직된 운동으로, 성년 남자에 대한 보통선거권, 비밀투표와 공정한 선거구 획정, 매년 선거, 후보자에 대한 자산 제한 철폐 등의 요구를 내세운 인민헌장을 발표하면서 전개되었습니다. 부르주아 계급의 성장과 병렬적으로 나타난 노동자계급의 운동은 계급적 예속에서 ‘자유’로워졌다고 표방되었던 자유로운 노동자들의 그렇지 못한 현실에 대한 저항이 그 기반이되었습니다. 1830년대 영국에서는 노동자의 권익을 보장한다면서 결국에는 부당한 처우를 긍정하게 만드는 신구빈법과 같은 악법에 대항해서,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구성하기 시작하였고, 전국단위 조합을 구성하고 파업투쟁을 조직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정부의 탄압에 의한 노동조합 운동의 부진은 국가권력에 대한 정치 투쟁을 통해서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기 시작하였고, 부르주아 계급과 노동자 계급의 적대적 상황에 대해 대처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계급의 독자적인 정치적 투쟁을 구성해야 한다는 인식이 싹트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1836년 런던에서 보통선거권 요구 투쟁을 위한 런던노동자협회가 창설되었고, 인민헌장을 작성해서 이를 실현시키는 것을 목표로 운동을 조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운동에서 노동자들은 그 자신들의 독자적인 조직을 구성하면서도 여러 중간 계급들과 연합해서 목표를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1837-1838년에 런던민주주의협회와 대북부동맹 등의 노동자 정치 조직이 형성되고, 1839년에는 차티스트들의 전국회의를 열어 인민헌장 실현을 목표로 설정하고 투쟁을 전개하기로 합의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중간 계급과 노동자 계급의 이해관계의 불일치와 지도부의 한계 속에서 점차 차티스트들의 운동은 힘을 잃었습니다. 이는 차티스트들의 운동 자체가 가지고 있는 모순점에서도 또한 기원하게 되는데, 차티스트들은 계급적 자립성과 계급 연대라는 모순적인 이상과 전술을 품고, 투쟁의 혁명으로서의 성격과 법에 대한 신뢰에 의존하는 모습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여줌으로 그 뜨거운 열기와 불만에 대비해서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한 결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1848년 혁명 전의 유럽 대륙: 독자적인 언어의 부재


 유럽 대륙에서의 상황은 다른 방식으로 구성되었습니다. 1814년 메테르니히로 대표되는 보수 체제로 유럽 대륙의 정치가 회귀한 이후 노동자 계급의 형성이 계속되는 상황 속에서도 정치는 여전히 봉건적인 문법을 사용하고자 하는 모순적인 상황이 지속되었습니다. 또한 1830년 프랑스에서 부르주아들의 집권으로 정부가 교체된 이후에도 노동자들에 대한 처우는 변화하지 않음으로 노동자들은 점차 자신의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기 위한 투쟁을 조기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우선은 노동자들의 집적된 불만에 의한 대중적이면서도 산발적인 저항 운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1831년의 리옹 봉기와 1884년의 슐레지엔 봉기 등의 사건이 이를 보여줍니다.

 이와 더불어 점차 노동자들의 자립성에 대한 요구에 대응하는 노동운동의 언어, 노동운동의 정치성에 대한 ‘새로운 언어’에 대한 모색이 이뤄지게 됩니다. 사회주의 사상이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1848년 혁명 전야에 작성된 『공산당 선언』은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사상의 급진화는 비밀 결사에 의하여 구성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비밀 결사는 대중적 조직, 노동운동의 대중적 영역을 획득하지 않고서는 단지 현실과 유리된 이상을 벗어나기 힘든 모습을 보여줍니다. 공상적 사회주의라고 불리는 이론가들의 한계는 바로 이러한 지점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839년에는 비밀결사를 중심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시도하는 블랑키의 봉기가 있었으나, 실패로 돌아가게 됩니다. 한편 프랑스에 머무르는 독일의 정치적 망명가들은 1834년 법외자 동맹을 구성하였고, 이후 보다 노동자 계급에 가까운 이들이 분리해서 나옴으로 의인동맹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이 의인동맹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합류하면서 공산주의자 동맹으로 재편되었고, 이 조직의 강령으로서 만국의 노동자들의 단결을 요구하는 『공산당 선언』이 작성되게 됩니다.

 이 선언문은 이전의 공상적 사회주의와는 달리 사회주의를 이성의 운동 속에서 지상으로 도입된 것이 아니라 근대 사회에서의 노동자 계급의 탄생 속에서 도달되어야 하는 역사적 과제로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에 전위, 비밀결사라는 형태와 노동자들의 대중운동이라는 형태는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야하는 것으로서 이야기됩니다. 사회주의, 더 정확한 표현으로는 공산주의는 프롤레타리아라는 몸과 공산주의 사상이라는 두뇌의 결합을 통해서 구성됩니다. 이는 노동운동이라는 흐름과 사회주의의 필연적인 결합 가능성과 결합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으로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필요성은 역설적으로 『공산당 선언』의 기대감이 좌절되는 것처럼 보이는 1848년 혁명의 패배 속에서 선명해지게 됩니다.

연옥을 지나는 혁명 : 계급 적대의 문제


 1848년 혁명은 이전의 대혁명과 같이 혁명의 물리력으로서 노동자 대중을 필요로 했습니다. 이 혁명의 시작은 파리 노동자들의 봉기였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발전 속에서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의 가장 선명한 적이 노동자임을 지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혁명의 실제적 동력과 이를 이끄는 자유주의적 공화파 사이의 대립이 발생하기 시작하였고, 6월 노동자 계급은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민중봉기를 일으키지만 실패하게 됩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와 같은 사회주의자들이 1848년 이전에 기대했던 혁명은 노동자들의 것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주의의 구상은 좌절하지 않고, 이 패배의 상황 속에서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부르주아 국가가 결코 노동자 계급을 위한 것이 아님을 자각하게 됨으로, 계급 적대가 존속하는 한에서 노동운동은 노동자들의 독자적인 정치성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을 지속해야 함이 더욱이 명확해진 것입니다.

 여기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이 서로 동일한 것이 아니지만, 서로를 향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근대 사회가 계급 간의 적대와 모순을 품고 촉발된 이상, 이러한 적대와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는 새로운 구상은 피억압 계급에게 필수적인 것으로서 등장하게 됩니다. 철학적 단어를 빌리자면, 노동운동은 사회주의를 필요로 한다라는 명제는 노동운동의 정의에서 기원하는 분석 명제가 될 수는 없지만, 노동운동의 투쟁 과정에서 연역되는 근대 사회가 잉태하고 있는 종합 명제로서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1848년 혁명 이후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은 서로를 끌어 안으면서 발전하는 양상을 보여주게 됩니다.

 마르크스는 1848년 혁명의 패퇴를 기록하며, 혁명이 연옥을 지나고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연옥이란 지옥과 천국 사이의 공간으로, 영원한 벌을 받는 죄인들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보속함으로 천국으로 들어갈 자격을 지니는 영혼들이 머무르는 장소를 이야기합니다. 혁명이 연옥을 지나고 있다는 진술은 혁명이 단순히 패퇴함으로서 영원히 불가능함을 증명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리를 찾아서 나아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에 마르크스는 18세기 혁명, 부르주아들의 혁명, 인권선언으로 이어진 자유주의의 혁명과는 다른 19세기 혁명이 필요함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 19세기의 혁명,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발전 속에서 태어난 새로운 노동자들에 의한 혁명은 아직 그 형식이 도래하지 않았고, 다만 그 내용으로서만 정의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1848년의 6월 봉기 이전의 여러 노동자들의 봉기들은 아직 하나의 방향으로 모아지지 못하고 산발적인 형태로 발생하거나, 부르주아 계급에 의하여 이용됨으로 패퇴하는 구성을 보여주었습니다. 6월 봉기는 이와는 달리 부르주아들에 의한 혁명의 전유에 대하여 노동자 계급이 최초로 대항한 사건으로서도 독해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아직 미약한 가능성으로서만 제시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인터내셔널의 결성과 파리코뮌이라는 이정표: 노동자들의 ‘새로운 언어’


 한편 노동운동은 패퇴 속에서도 자신들을 보존하고, 서로 연대함으로 이 문제 상황을 극복하고자 하였습니다. 노동운동이 잠시 조용해진 것처럼 보이는 1850년대는 유럽과 그 식민지들 속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이 지속되던 시기로 노동자 계급이 계속해서 성장하던 시기였습니다. 식민지 사회에서는 또한 노동자라는 새로운 계급의 운동과 민족해방을 위한 운동이 함께 구성되었고,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은 또한 이러한 피식민 민족의 민족해방운동에 연대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와 프로이센에 의하여 분할점령되었던 폴란드에서의 민족해방운동은 1860년대 초에 점차 강화되기 시작하였고, 1863년 1월에 폴란드 전역에서 봉기를 일으키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연대하던 노동운동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노동자들의 국제적인 연대를 구축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노동자들 사이에서 생기기에 이르렀고, 이듬해인 1864년에 국제 노동자 조직을 구성하며 국제 노동자 협회, 제1인터내셔널이 창립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더해서 노동운동의 흐름, 노동자들의 정치 운동이 새로운 형식, 언어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1848년 혁명의 결과로서 등장하게 된 프랑스 제2제정의 끝에 일어났습니다. 1870년 보불전쟁이라는 대외적 위기와 내부적 모순의 중첩 속에서 프랑스 제2제정은 붕괴하게 되었고, 프랑스 제3공화국이 건국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제3공화국으로의 이행 과정에서 파리의 노동자, 민중은 1848년 6월에 포기당했던 노동자들의 독자적인 국가를 건설할 것을 주장하였고, 1871년 3월에 파리코뮌이 건설되기에 이루렀습니다. 여기서는 그간 노동자 정치 운동과 사회주의 사상이 주장해오던 여러 사항들, 여성의 참정권 보장, 노동자들의 통제 기반한 경영, 아동 노동의 폐지 등을 이뤄냈습니다. 하지만 파리 코뮌은 부르주아와 왕당파의 공세에 의하여 폭력적으로 분쇄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 당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실패에도 불구하고 1871년 파리코뮌은 노동운동의 한 기점이 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동자들에 의한 자치의 가능성, 노동자에 의한 생산 경영의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이자, 18세기 혁명의 언어로 만들어지는 부르주아 국가를 넘어서는 가능성으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어지는 노동운동의 흐름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사건이자, 사회주의의 방향성을 결정짓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앞서 1848년 혁명 이전에 사회주의 사상의 발전과 노동조건의 악화 속에서 일어난 노동자들의 운동의 발전은 서로 다른 위치에서 다른 방향성을 가지고서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848년 혁명 전야의 『공산당 선언』은 19세기 초반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과는 달리 노동자 계급의 필연적인 성숙에 대해서 지각하고, 과거를 이상화하지 않는 방향으로 노동운동의 미래, 사회주의 정치의 미래를 제시하지만 그 현실적인 형태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는 1848년 혁명의 패배와 노동자 계급의 지속적인 소외 속에서도 마찬가지로 노동운동은 반복적으로 등장하지만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의식을 지니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 패배 속에서 진행된 국제적 연대의 전진과 노동자 계급의 발전, 노동운동의 조직화는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의 만남을 이끌어냈고, 파리코뮌이라는 가능성은 각기 새로운 언어와 몸을 필요로 하던 두 흐름을 종합해서 나아갈 수 있는 혁명의 청사진을 제공하였습니다. 물론 이 ‘감동적’ 만남은 일면적으로 서술될 수는 없습니다. 노동운동의 여러 참여자들은 서로 다른 이상을 품고 있었고, 제1인터내셔널 내에서 일어났던 마르크스와 바쿠닌 간의 의견 갈등, 노동자들의 국제 연대의 어려움 등은 여전히 존속되고 있었습니다. 이는 파리코뮌 이후 국제 노동자 연대가 극심한 탄압에 직면하며, 더 강화되었고 바쿠닌을 비롯한 아나키스트들과 마르크스를 비롯한 사회주의자들의 노선 갈등의 지속 속에서 제1인터내셔널은 1872년 사실상의 해소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코뮌, 제1인터내셔널의 붕괴에서 노동절까지: 각 국가에서의 독자적인 운동의 성장과 수렴


 파리코뮌에 대한 폭력적인 진압 속에서 프랑스 노동운동, 사회주의는 잠시 쇠퇴기를 겪게 됩니다. 이에 대비해서 독일에서는 정당을 기반으로 하는 노동운동, 사회주의가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1863년 라살의 주도하에 전독일노동자협회가 건설되었고, 1869년에는 보다 급진적인 노동자 정당인 베벨과 리프크네히트 주도 하에 아이제나흐에서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당이 건설되었습니다. 이 둘은 1875년에 고탕 강령을 채택하면서, 오늘날의 독일 사민당으로 이어지는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이 창당되기에 이르렀습니다. 19세기 후반부터는 프랑스와 라틴권 국가들,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다시 노동운동을 구축하려는 시도가 두드러집니다. ‘혁명적 노동조합주의’ 혹은 ‘혁명적 생디칼리즘’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 조류는 프랑스의 노동총연맹(CGT), 미국의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 스페인의 전국노동총연맹(CNT)의 건설로 이어집니다.

 영국에서는 차티스트 운동의 패퇴 이후로, 노동자들의 독자적인 정치 투쟁, 노동자 정당으로의 투쟁은 두드러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제1인터내셔널의 혁명성과는 다른 지향을 지닌 지식인 중심의 페이비안협회의 주도하에서 노동 조건을 점진적으로 개선하려는 시도를 보여주었습니다. 따라서 노동자 정당 운동, 혁명적 지향과 노동조합의 발전이 함께 구성되는 경향을 보여준 유럽 대륙과 식민지에서의 상황과는 달리 독자적으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1871년 노동조합이 합법화됨으로 파업권을 얻고,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한 단체 협약이 가능해지는 상황에서도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러한 노동조합은 주로 숙련 노동자들만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여러 의제에 대하여 연대해서 투쟁을 벌이는 태도를 취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노동운동 지도부와 노동조합 일반조합원 사이의 갈등으로 이어졌고, 1889년 런던 항만 노동자 파업을 기점으로 신노동조합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사회주의의 강력한 영향 속에서 노동운동이 다시 조직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즉, 코뮌의 붕괴 이후로 노동자 정당 건설 운동의 진행, 노동자 계급의 지속적인 성장과 노동자들의 독자적인 정치성 획득을 위한 투쟁이 지속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제1인터내셔널과 같은 노동자 국제 연대 조직 또한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마침내 독일 사회민주당의 주도 하에서 1789년 프랑스 대혁명에서 100년이 되는 해인 1889년에 제2인터내셔널이 건설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앞서 말한 8시간 노동 투쟁으로 대표되는 노동 조건 개선을 위한 노동 운동과 사회주의의 발전 속에서 진행되었습니다. 노동 조건의 개선을 위한 각지에서의 노동운동들의 빌전을 국제적 연대 속에서 노동자 계급의 국제적인 투쟁으로서 정립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세미나의 주제가 되는 노동절의 제정 또한 바로 이러한 국제적인 연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국제적인 연대는 각 국민국가의 한계 속에서 점차 흐려지는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하였습니다. 경제투쟁에만 주안하는 조합주의가 나타났던 것이 이를 보여줍니다. 또한 베른슈타인의 주도 하에서 구성된 수정주의는 혁명적 지향과는 다른 지향을 지닌 정치를 구상하였고,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개혁주의적 운동과 혁명주의적 운동의 갈등이 전면에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해결될 수 없는 갈등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노동자들의 국제 연대는 노동자들의 전쟁 동원 속에서 분열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분열 속에서 노동운동, 사회주의는 다시 한 번 거대한 전환을 맞이하게 되는데, 부정적이 귀결로 나아가야 할 것처럼 보이는 이 분열의 흐름은 제국주의 세계질서의 약한 고리에서 반전을 이루게 됩니다.

20세기의 혁명: 비-유럽으로 퍼져나가는 노동운동, 사회주의 사상


 러시아의 사례는 유럽의 관점에서는 아주 독특하면서도, 비-유럽의 관점에서는 일정 정도의 치밀함을 보여줍니다. 러시아 제국은 유럽으로부터 뒤쳐진 후진 국가, ‘아시아’적인 국가로서 서유럽을 따라잡기 위한 목표를 지니고 국가를 개량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차르 전제정에 대한 불만은 이러한 개혁 과정에서도 축적되고 있었고, 1870년대부터 나드로니키라고 불리는 농민 기반의 혁명 사상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혁명 구상은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인민의 의지당과 1875년 남러시아 노동조합, 1902년 사회혁명당 등의 조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한편 마르크스주의적 조직은 망명가들을 중심으로 1883년 플레하노프 주도 하에서 구성된 노동해방단이 구성되었고, 러시아 내부에서도 블라고예프, 페도세예프 등을 중심으로 마르크스주의 서클 운동이 조직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키예프 등의 도시 지역의 마르크스주의 조직과 노동자 조직이 연합해서 1889년 러시아 사회민주당을 구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두 조직은 각기 농민과 도시 노동자라는 다른 두 초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한편 러일전쟁으로 말미암은 군사적 공백과 사회적 모순의 심화 속에서 1905년 1차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혁명은 차르 제정 자체를 전복하지는 못했지만, 러시아 제국의회, 국가 두마의 설립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혁명의 과정에서는 러시아 노동자들의 파업이 주도적인 역할을 차지했으며, 노동자 평의회, 즉 노동자 소비에트가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혁명은 지속되지 못했고, 국가 두마의 강제 해산과 1907년 6월의 쿠데타 속에서 다시금 혁명 세력들을 억압하는 국면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의 반전은 앞서 말한 국제 노동자 연대의 분열을 일으키는 제1차 세계대전의 진행 속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각 국가의 노동자 동원 속에서 분열되고 왜곡되기 시작한 노동운동에 대항해서 1915년 제2인터내셔널의 일부는 인터내셔널을 재조직하고자 짐머발트에서 회의를 진행했습니다. 제2인터내셔널 속에 지속되어온 개혁주의자와 혁명적 경향의 갈등은 이 속에서도 여전히 유지되며 레닌 중심의 짐머발트 좌파와 로베르트 그림 중심의 다수파의 갈등이 나타났습니다. 이런 국제 노동운동의 분열상 속에서 1917년 러시아 제국 내에서는 상트페테르부르크(당시 명칭은 ‘페트로그라드’)에서 노동자들과 병사들을 중심으로 총파업과 혁명이 일어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의 무리한 진행 속에서 집적된 러시아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였습니다. 이후 레닌은 러시아로 복귀해서 러시아 사회민주당 내의 볼셰비키 그룹을 이끌기 시작하였고, 볼셰비키들은 혁명의 결과로 만들어진 소비에트들을 중심으로 2월 설립된 임시정부를 무너뜨리고 10월 새로운 무장 봉기를 통해서 소비에트 권력에 의한 통치를 시도하였습니다. 1871년 파리 코뮌 이후로 다시 한 번 노동자 통제를 따르는 정부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혁명 세력의 상황은 그리 좋지는 못했습니다. 독일과의 전쟁에 대해서 휴전 협정을 체결하여야 했고, 러시아 내에 남아있는 반혁명 세력과의 투쟁이 이어졌습니다. 또한 연합국들은 새로이 등장한 노동자들의 정부를 받아들이지 않고자 하였고, 외교적 고립 속에서 러시아 혁명 세력은 1922년 소비에트 연방의 수립까지 내전을 거쳐야 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혁명 세력은 1918년 제2인터내셔널의 분열 속에서 오염된 사회민주당이라는 당명을 공산당으로 대체하고, 1919년 새로운 노동자들의 국제 연대 조직인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을 조직했습니다. 이에 제2인터내셔널 속 혁명적 지향과 개혁적 지향 사이의 갈등은 두 지향의 분리와 혁명적 지향에 근거한 새로운 세력의 창출로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갑니다. 나아가 코민테른은 여러 식민지의 노동운동,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하고 이들의 연대를 구성함으로 유럽 대륙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온 노동자 국제 연대를 확장하고, 이제 막 노동운동이 구성되고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발전하기 시작된 여러 사회들에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합니다.

코민테른 이후의 노동운동: 사민주의와 공산주의의 평행선, 당 중심의 노동운동


 1920년대는 마치 희망찬 선언들을 통해서 시작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동유럽의 여러 국가들은 해방되어 자신들의 국가를 얻게 되었고, 봉건 제국들은 붕괴되었습니다. 또한 민족자결주의 선언과 소련이라는 새로운 노동자, 피억압자들의 국가는 억압받던 노동자들 그리고 식민지 민중들에게 희망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의 종전 직후 일어난 독일 11월 혁명에서의 노동자 세력의 패퇴와 이듬해 1월에 일어난 스파르타쿠스 연맹의 봉기에 대한 잔인한 진압, 1918년 헝가리 혁명의 실패 등은 공산주의 운동의 확장이 어려운 상황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비-유럽 국가들에서의 진전, 1919년의 미국 공산당 건설, 1921년 중국에서의 공산당 건설과 1922년 일본에서의 공산당 건설 등은 노동자들의 새로운 운동 방향, 당 중심의 운동 방향이 일반화되고 있음 또한 보여줍니다. 이후 코민테른의 연대와 각 사회에서의 노동자 계급의 성장에 근거해서 노동운동의 한 측면은 당을 중심으로, 혹은 당이라는 혁명적 전위의 구성을 중심으로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반대로 제3인터내셔널과 혁명적 경향에 대하여 만족하지 않는 이들을 중심으로는 의회 기반의 개혁주의적 노선을 추구하는 사민당 중심의 노동운동과 아나키스트 주도 하의 노동조합주의 운동이 구성되었습니다. 이에 노동조합들의 국제 조직 또한 나눠지게 되었습니다. 사민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 국제노동조합연맹이 설립되었고, 공산주의자들을 중심으로는 적색노동조합연맹, 프로핀테른이 설립되었습니다. 또 각 국가 내에서도 아나키스트 중심의 노동조합운동과 공산주의자 주도의 노동조합운동이 모두 존재하는 양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하지만 이들이 반드시 반목하는 것만은 아니고, 노동자들의 연대 속에서 함께 하기도 하고 서로를 돕는 모습 또한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이어지는 파시즘에 대한 투쟁 속에서도 갈등과 협력이 반복 구성되는 여러 형태로 나타납니다.

분열 속의 타격, 자본주의의 고조되는 위기와 파시즘의 대두


 노동운동의 분열이 지속되는 와중에 1930년대 자본주의 질서는 대공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베르사유 조약 속에서 불안정하게 구축된 중부 유렵 일대와 후발 공업 국가인 일본, 이탈리아 등지에서는 이러한 위기에 대처하기 위하여 점차 국가주의적인 경향을 강화하고, 지배 계급에 의한 폭력적 독재 체제인 파시즘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 파시즘은 집단주의에 기반하여 각 직업 단체를 국가의 통제 하에 두는 코포라티즘 체제를 통해서 노동자들을 통제하였습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노동자들을 정부에 포섭하는 장치로서도 작동하게 되는데, 나치의 정식명칭이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라는 점은 특기할만 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노동자’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발전 속에서 생성되는 피억압자이자,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함으로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노동자가 아니라 신화 속에서 구성되는 형이상학적 주체에 가까운 것으로서, 이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노동운동’의 한 사례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노동운동의 분열상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올바르게 대처할 수 없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특히나 독일에서 파시즘의 등장 초기 국면에 대한 공산당의 ‘사회파시즘론’과 같은 오판은 파시즘의 위험성을 경시함으로, 사민당과의 연합을 통한 파시즘의 집권에 전선 구축을 늦추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935년부터 코민테른은 파시즘에 대한 노동자 계급의 통일전선을 구축할 것을 요구하였고, 노동자 계급, 노동자 전위 정당의 지도 하에서 파시즘에 맞서는 투쟁을 구성할 것을 기본적인 노선으로 삼아서 파시즘에 대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는 스페인 내전에서의 인민전선으로 나타났고, 제2차 세계대전 동안의 중국 공산당의 투쟁, 동유럽 지역에서의 공산주의 게릴라들의 투쟁 등의 노선을 결정지었습니다. 이에 1945년 전쟁이 끝난 이후, 동구권 일대에는 인민전선을 기초로 하는 노동자 계급 중심의 국가인 인민민주주의국가들이 건설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아시아에서도 국민당과의 내전을 거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지닌 공산주의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이 건설되었습니다.

전후의 세계 질서 재편 속에서의 다변화


 노동자 계급의 성장이 모든 사회에서 두드러지고, 새로운 사회의 가능성이 드러나면서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세계 질서가 구성된 2차 대전 전후의 상황은 노동운동의 역사를 단순히 주요한 자본주의 국가들을 중심으로 서술할 수 없게 만듭니다. 이에 김금수 선생님과 같은 경우에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 사회주의 블록, 아시아 국가,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의 6개의 권역으로 분할해서 노동운동의 역사를 정리하였습니다. 좀 더 고전적인 방식으로 이 서술을 번안하면 제1세계, 제2세계, 제3세계로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3세계와 제1세계 사이에 걸쳐있는 것처럼 보이는 한국의 경우에 대해서는 다음장에 더 구체적으로 서술할 것이기에 차치하고서 한국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제1세계와 제3세계를 중심으로 전후 노동운동의 역사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제1세계의 노동운동: 당에서 벗어난 운동과 부문 운동의 대두


 파시즘에 대한 전쟁 속에서 함께 하는 것처럼 보였던 서유럽의 자유주의 국가들과 소련은 그 본성 상 함께 할 수 없었음은 자명했습니다. 소련의 탄생과 존재 자체는 여러 국가들에게 위협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각 국가는 노동자들의 불만의 집적을 피하기 위하여 유화책을 사용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노동자의 처우에 대한 개선이 이뤄지게 됩니다. 이는 부르주아, 지배계급의 인간성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현실적인 위협의 존재에서 기반한 것이었습니다. 사회주의 세력의 성장에 대한 대응으로서 도입된 독일 제국에서의 비스마르크의 복지 제도처럼 전후 냉전 체제의 성립 속에서 공산주의의 침투를 막기 위해서 노동자들에 대한 복지 제도가 확충되기 시작됩니다. 이미 전간기 북유럽에서는 혁명적 경향에서 벗어나서 이들을 의식하는 ‘민중의 집’과 같은 형태의 노동자들의 생활 조건을 개선하고자 하는 시도가 개혁주의적 정치가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왔고, 이는 오늘날의 복지국가의 원형으로 이야기되기도 합니다.

 또한 전후의 새로운 세계 질서의 구상은 18세기 혁명의 결과로 구성된 자유주의를 새로이 모습으로 발전시킬 것을 요구했습니다. 독일의 국가 재건 과정에서 구성된 ‘사회적 시장경제’라는 시스템은 국가 주도 하에서의 시장 주체의 배영과 사회 전부문에서의 시장의 형성, 시장 논리의 도입이라는 틀을 유지하면서 전후의 경제 질서를 구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프랑스, 영국에서도 사회보장제도가 정립되었으나,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표어와는 달리 이들의 사회보장제도는 노동자들의 불만과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는 수준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장 중심의 질서를 위한 장치로서 도입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식민지 국가들의 독립 속에서 기성의 제국주의 기반의 경제질서의 변화는 각 국가로 하여금 보수적 정치 지향을 지니게 하였고, 영국 보수당의 장기집권과 드골의 집권, 미국의 지원 하에서의 일본 55년 체제의 정립 등이 이뤄지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노동운동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던 공산당 계열 조직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 레드퍼지를 요구했고 1956년 서독의 공산당 해산, 1950년대 프랑스 공산당의 정치적 배제, 매카시즘 등이 펼쳐졌습니다. 이는 노동운동 전반에 대한 억압으로서도 이어졌고, 사민주의 정당은 점차 친자본주의적인 입장을 펼치는 경향을 보여주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는 한편으로는 7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위세를 떨치게 되는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통치 논리, 통치 구조가 각 국가 권력의 주도 하의 전후 냉전 질서의 형성 과정에서 긴 발생의 역사를 지녀왔음을 보여주는 것으로서도 독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1960년대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대응으로서, 1950년대에 비해서 급진화된 경향을 보여주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는 식민지 사회에서의 민족해방운동들에 대한 호응, 노동자 계급에게 여전히 잔존하는 모순, 대학 교육의 일반화로 말미암은 학생운동의 성장과 맞물려서 1968년의 반체제 운동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 반체제 운동은 소련의 대외 정책과 긴밀한 연관 관계를 맺던 공산당으로부터 벗어난 노동운동의 조직으로도 이어졌고, 노동운동을 벗어난 신사회운동의 출현으로도 이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의 다변화와 동반적 성장이라는 양상보다는 시장논리의 일반화와 ‘TINA’로 대변되는 영원화라는 신자유주의의 젼면화 속에서의 노동운동의 침체로 이어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공산당 중심의 운동 또한 점차 퇴조를 겪게 되고, 공산당의 침체 혹은 보수화에 대응하려던 급진 운동들 또한 개별 조직의 산개로서 나타나게 되었고, 이탈리아의 ‘오페라이스모(노동자주의)’와 같은 70년대 초반까지 유지되었던 급진적 흐름은 70년대 말에 붕괴되는 양상을 보여줍니다. 이는 신자유주의 하의 노동운동의 전반적인 침체, 1980년대의 전반적인 노동조합 조직율의 침체로서 이어지게 됩니다.

식민지, 제3세계 국가에서의 노동운동: 중동과 라틴 아메리카


 한편 제국주의의 확장 속에서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이식 받은 식민지 사회에서는 노동운동이 민족해방운동과 결부되어서 작동하는 양상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식민지 사회에서의 ‘저발전의 발전’과 같은 상황은 노동운동의 성장과 사회주의의 성장이 선진 자본주의 국가와는 다른 방식으로 구성되어야 할 필요를 제시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의 탄생과 공산주의 운동의 성장은 서구의 식민주의적 근대와는 다른 근대화의 가능성을 식민지 사회에 제시하였고, 냉전 체제의 형성 속에서 전후에 독립한 많은 국가들은 사회주의적 지향을 가지고서 사회를 구성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사회주의’를 지향한다고 해서 노동운동에 친화적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집트와 시리아, 리비아와 같은 아랍 사회주의 국가들의 경우에는 노동자들의 민주적인 노동조합 운동을 용인하지 않는 모습 또한 보여주었습니다. 아랍 사회주의는 서구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침탈로부터 사회를 수호하는 역할을 지니면서도 동시에 내부적으로는 노동운동과 마찰을 겪기도 하는 양상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는 이란 이슬람 혁명의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납니다. 이슬람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그리고 여러 경향의 사회주의자들이 함께 혁명을 도모하지만, 이슬람주의자들의 주도 하에 정부가 구성되며 점차 다른 경향들은 억압되고 노동운동은 정부의 통제 아래로 들어가게 됩니다. 국제적 차원에서의 제국주의의 침탈에 대한 저항에서는 같은 편에 선 이들이 내부의 사회 조직에 있어서는 다른 지향을 가지고서 대립하고, 노동운동은 동원되면서도 독자적인 이름을 얻지 못하고 추락하거나 정부, 지배계급의 통제 아래로 전환되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단순한 접근이 아니라 각 사회, 국가의 특수성에 기초해서 살펴보아야만 올바르게 행동할 방법, 연대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미국의 주도 하에서 종속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자리잡으면서, 군사 독재 정권에 의한 노동운동의 탄압이 두드러지게 됩니다. 쿠바에서의 혁명은 라틴 아메리카의 혁명에 대한 기대감을 고조시켰지만, 60년대 동안의 여러 시도에도 혁명은 구성되지 못했고, 설령 사회주의 지향의 정부가 집권하더라고 미국 주도하는 쿠데타 속에서 친미 군부독재 정권이 드러서는 양상을 보여주게 됩니다. 이 과정 속에서 노동운동은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서 노동자들의 독자적인 노동조합을 설립하고자 하는 민주노조 운동으로 구성되는 양상을 보여주었고, 1979년의 브라질 금속노동자 총파업과 1980년 룰라 주도의 노동자당 창당 등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남아공과 한국에서도 유사한 흐름을 구성하는바, 제1세계에서의 노동운동의 퇴조라는 양상과는 다른 리듬을 가지고서 제3세계의 노동운동이 구성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세계화’ 이후: 노동운동 위기론과 현실 사회주의의 침체를 어떻게 볼 것인가?


 따라서 우리는 단순히 1980년대의 노동조합의 퇴조라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의 노동운동의 침체 양상을 노동운동 전반의 경향으로 독해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세계화, 신자유주의화 속에서 노동자들의 연대가 더 이상 불가능해진다는 식의 비관적인 전망을 되풀이하는 것으로 노동운동의 역사의 최종장을 작성할 수는 없습니다. 여전히 노동자들이 이 사회의 생산과 재생산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으며, 노동은 인간의 사회적 본질로서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세계체계의 변화 속에서 주요 산업과 산업의 지리적 배치가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 노동운동의 시간이 지역에 따라서 다양한 구성을 지니게 된다고 독해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2000년대, 2010년대 전반의 성장을 견인한 세계의 공장으로서의 중국의 성장과 개발동상국에서의 제조업 성장과 국제적 분업 구도의 발달 그리고 이로 말미암은 노동운동의 성장은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도리어 세계화의 진행은 노동자 계급으로 하여금 다시 연대하여 투쟁할 것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세계 전역으로 확산되고 경제 공황을 발생시키던 1990년대의 수많은 파업들은 노동자 계급과 노동운동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저항으로서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포드주의를 넘어선 린-생산양식의 도입을 통해서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세계적 수준에서의 자본의 순환을 통해서 노동운동을 효율적으로 분쇄할 수 있는 다국적 기업이라는 상은 일정 부분 진실을 지니고 있지만,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위기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윤율의 저하 경향으로 인한 자본주의의 내재적 모순의 심화와 과잉생산으로 말미암은 공황의 돌발이 지속될 것이고, 노동운동은 이 필연적인 위기 속에서 다시 전면에 서야할 것입니다.

 하나 더 고려해야 할 지점은 당 기반 노동운동이 결실이었던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침체입니다. 대표적으로 공산당을 벗어난 노동운동인 폴란드의 자유노조 운동과 동구권의 붕괴는 앞서 말한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의 오래된 결합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것과 같은 상황을 보여줍니다. 노동자들은 ‘자유’를 위하여 사회주의를 벗어나고자 한 것이기 떄문입니다. 이는 현실 사회주의권이 신자유주의로 대표되는 전후 냉전 질서 속에서 수세적 상태에 놓이면서 계급 적대의 문제를 국제적 차원에서, 그리고 내부적 차원에서 충분히 수용하지 못하고 있는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자 신자유주의적 노동 체제의 도입, 고전적인 자유주의적 체제의 완전화가 노동자의 ‘불행해질 자유’를 마치 진정한 ‘자유’인양 선포하는 양상을 보여줍니다. 이에 연대를 통해서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는 개인의 문제로 전환되고, 시장 경영의 원리는 자기 경영의 원리로 나아감으로 노동의 강화된 분절 속에서 노동운동의 사회적 성격, 독자적 성격은 감소하는 것처럼 보여지기 쉬운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례들을 통해서 노동운동은 사회주의와 결합하지 않아야 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서 단호하게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지난 투쟁의 역사를 봄으로써 알 수 있듯이 노동운동은 단지 노동자의 노동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일상적 투쟁에 그칠 수 없습니다. 민주노총의 강령에 대해서 볼멘소리를 내는 이들이 지적하는 ‘정치세력화’는 노동운동이 19세기, 20세기를 거쳐오면서 찾아낸 방향성입니다. 당 중심 운동의 특정 경향의 좌초 속에서도, 노동운동은 순전한 ‘경제투쟁’으로 머무름으로서는 아무것도 구할 수 없음은 자명합니다. 노동자가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타자의 시혜, 기적만을 기대하고 있다면 진정 얻어야 하는 바를 얻어낼 수 없음이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세력화’로의 이행을 위해서는 노동자들의 독자적인 사상이 필요함 또한 분명합니다. 따라서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의 결합이란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발생 이후로 만들어진 사회적 구조 속에서 노동자, 민중이 단지 타자의 의지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지 않고 스스로의 지배 속에서 머무르기 위하여 포기할 수 없는 전제로서 노동자, 학생에게서 지속적으로 논의되어야하고 진전되어야 할 주제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한국의 노동운동


조선에서의 노동운동의 시작, 식민지 근대에서의 양상


 한국의 노동운동 또한 한국 나아가서 한반도 일대에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정착되는 시기 이후부터 이야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제국에 의하여 1910년대 근대적 소유권 제도가 확립되면서도 정치 제도는 ‘무단통치’로 대표되는 식민지배의 확장이 이뤄지는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저항은 민족해방운동으로서의 성격을 또한 지니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다른 민족해방운동들과 같이 1919년의 3.1 운동을 기점으로 노동운동은 점차 조직화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1920년에는 조선노동공제회가 결성되어서 노동운동을 조직하고, 실천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진정 도시 빈민, 프롤레타리아를 중심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지식인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에 1924년에는 보다 강한 노동자의 독자성에 대한 지향을 지닌 조직인 조선노농총동맹이 결성되어서 활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본제국에 의해서 집회가 금지된 이후에도 이들은 노동쟁의, 소작쟁의를 조직하고 활동하였으며, 전국적 연결망을 구성하고자 시도하였습니다. 이런 조직화의 결실은 1929년 원산노동자들이 연합해서 일으킨 원산총파업에서 보여집니다.

 하지만 1930년대에 들어서 점차 일본제국이 전시 파시즘 체제로 이행하기 시작하면서, 노동운동의 이런 급진적 성격은 억압받기 시작합니다. 이에 노동운동, 특히나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이 비합법 영역에서 구성되기 시작합니다. ‘북선 공업화’라는 일본제국의 전략에 따라서 특히나 공업 노동자들이 많이 위치하던 원산, 흥남 등의 지역을 중심으로 노동자들과 지식인들이 연합해서 ‘적색노조’를 조직하고 일부는 항일무장투쟁과도 연결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신흥탄광파업, 평양고무노동자파업 등의 파업투쟁은 단순히 태업만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강화된 탄압에 맞서는 폭력 투쟁의 형태를 취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는 식민지 조선에서의 투쟁은 그것이 단순히 일상적인 투쟁에만 머무를 수 없고 탄압의 무게 속에서 정치성을 목표로 하는 폭력 투쟁의 형태를 또한 취해야 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전평의 해체에서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까지: 노동조합운동의 독자성을 획득하기


 식민지 체제에서의 해방은 식민지 민중의 자주적인 노력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일본제국의 패전에 의해서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식민지 시기 동안의 노동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경험은 해방 정국에서의 노동자, 민중의 정치적 활동의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이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건설과 전평의 주도 하에 일어난 미군정에 의한 불안정한 통치와 노동운동, 사회주의 탄압에 대응하는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대구에서의 항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어 이듬해 봄 3월 총파업 등의 운동을 조직하였으나, 점차 남한 사회에서의 노동운동은 강한 탄압을 마주하게 되었고, 1948년 남한 단독 정부가 수립되며 전평이 불법화되는 상황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1950년 한국 전쟁으로 말미암은 폭력에 기초한 분단 체제의 수립은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반공주의라는 미명 하에서 탄압해오는 조건을 만들었고, 이승만 정부 이후의 군부의 통치 속에서도 노동자들의 운동은 억압되어 왔습니다. 특히나 대한노총의 정립은 노동조합을 일종의 어용조직으로 만들어버렸고,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내는 조직이 아니라 정부에 의한 노동자들의 조직화를 위한 역할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는 군부 정권 치하에서도 마찬가지로 한국노총으로 재편된 어용노조는 노동자 억압기구로서 기능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1970년 전태일 열사는 분신을 통해서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표출하고자 했고, 어용조직으로서의 노조에서 벗어난 노동자들의 노조를 위한 운동, 민주노조운동이 시작되기에 이르렀습니다. 특히나 청계피복 노조와 같은 경공업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설립을 중심으로 한국노총과는 다른 구조와 지향을 지닌 노조들이 만들어졌습니다. 특히나 1970년대 후반 유신 체제에서의 경제 위기는 YH무역사건과 같은 정치적 투쟁과 노동운동이 결합된 형태로 표출되기 시작하였고, 지배 계급 내의 불안을 조성함으로 유신 체제의 종말을 이끌어내게 됩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이 종말은 군부 통치의 끝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체제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폭력과 학살을 동만한 신군부의 집권은 ‘노동계정화조치’ 등을 통해서 1980년대 초반 민주노조 운동을 강하게 압박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이들의 유산은 상실되지 않고 노동자들의 조직 경험으로 남아서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자원이 되었습니다.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계승과 구로동맹파업: 노동운동의 연대성, 정치성의 회복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은 다소 산발적이라는 점에서 한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는 유신체제에 의한 억압에 기초한 것으로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들이 80년대 신군부에 의한 민주노조 운동에 대한 탄압 정국 속에서 구성되기 시작합니다. 또한 80년대는 ‘학출’이라고 불리는 학생운동가 출신의 노동운동가들이 배출됨으로 민주노조운동의 인적 자원이 강화되고 여러 대중적 기반과 연대할 가능성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이런 지점에서 학출은 단순히 연대의 강화 원인으로서만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신군부에 의한 통치 속에서 통치가 유신체제의 서슬퍼런 억압의 형태를 취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고, 장기적 군부 독재에 대한 노동 탄압에 대한 범민중적인 반감에 기반한 연대의식이 형성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한 증거로서도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연대의 결실 혹은 가능성은 1985년 구로동맹파업에서 나타납니다.

 공장이 몰려있던 구로 일대에서는 1984년부터 민주노조가 결성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봉제업종과 전자산업이라는 두 업종을 중심으로 구성된 공단은 노동자들이 서로 동질감을 갖게 만들어주는 조건으로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조직적, 산업적 배경 속에서 1985년 구로 지역 일대의 민주노조들은 대우어패럴의 임금인상투쟁에 대한 정부의 탄압에 대응해서 동맹파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는 비록 정부의 탄압에 의하여 분쇄되었으나, 노동운동이 기업별노조의 산발적인 운동에 그치지 않고 노조 간의 정치적 연대투쟁으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로서, 이후 서울노동운동연합이 구성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서울노동운동연합은 단순히 조합주의적인 관점에 그치지 않고, 독재 자체에 대한 반대로도 의식을 확장시키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1986년에는 노동절 가두집회를 주도하며 반독재와 노조 민주화를 모두 요구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바로 직후에 국가보안법에 의하여 반국가단체로 규정이 됨으로 해체되게 되었으나, 전국노동조합협의회로 이어지는 길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또한 살펴볼 수 있는 지점은 경공업 중심의 노동구조가 점차 중공업과 대공장 노동자 중심의 구조로 전환되고 이러한 대공장 노동자들의 증가 속에서 노동자의 성격에 대한 규정이 사회변혁의 주체로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성격에 대한 인식이 드러나는 지점으로서 대중조직으로서의 노동운동의 조직화와 전위조적으로서의 노동운동의 조직화라는 동상이몽이 노동운동 속에 자리잡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과 지속되는 탄압 속 전노협의 행진: 87년 체제에서의 충돌


 87년 6월의 형식적 민주화는 그 자체로는 노동자의 목소리를 반영하기에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이어지는 여름 동안에 임금인상, 노동 조건 개선과 민주노조건설을 요구하는 노동운동을 펼쳤습니다. 7월 현대미포조선소노도오조합의 노조결성투쟁에서 시작해서, 현대중공업노조 결성투쟁이 이뤄졌고, 현대그룹노조협의회가 구축되었습니다. 8월에는 대우조선 노동조합의 투쟁 과정에서 경찰의 최루탄 난사에 이석규 열사가 사망하였고, 투쟁은 전국적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이러한 진행에서 알 수 있듯이 87년의 대투쟁은 특히나 대공장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노동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9월에 들이닥친 정부의 강경 대응은 투쟁의 열기를 진압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노동조합 설립은 지속되었고,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은 앞서 구로동맹파업에서 벌어진 지역에서의 연대를 조직화함으로 정부의 탄압에 대응하는 노동조합 조직을 구축하고자 했습니다. 이듬해인 1988년에는 세계 노동절 100주년을 맞이한 노동자 대회를 진행하였고, 대학생들과 노동자들의 연대 속에서 노동운동이 진행되는 양상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노조의 결성 열기는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설립으로 이어지고, 1990년에는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전노협의 설립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 설립의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정부는 80년대 말의 경제적 불안정의 책임을 노동자들의 좌경화에 물으며 노동자들의 전국적 조직 건설을 방해하기 위한 갖은 공작을 벌였지만, 1989년 11월 경찰에 의한 봉쇄를 뚫고. 서울대학교에서 전국노동자대회를 진행하고 전노협 건설 일정을 선포하였습니다.

 1990년 전노협 건설 이후에도 정부의 와해 공작은 지속되었고, 업무방해를 명목으로 전노협 지도부에 대한 구속이 이뤄졌습니다. 이러한 정부의 공작에 대응해서 전노협과 노조들은 대항하는 투쟁을 벌이고 노동절을 기점으로 전국 동시 파업 투쟁을 조직함으로 맞서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듬해에도 정부의 전노협 탄압은 지속되었고, 각 지역의 노동운동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공작을 전개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박창수 열사의 의문사 사건이 일어났고, 강경대 열사의 분신과 더불어 5월 18일의 전국 총파업투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ILO기본조약 비준을 요구하는 ILO공대위가 결성되었고, 1992년 노동절 대회에서는 ILO기본조약 비준과 노조 탄압 분쇄 등을 요구하였습니다. 한편 1992년은 대통령 선거가 이뤄지던 해로, 노동운동은 어떤 후보를 선출할 것인지, 보수야당에 지지를 보내야 할 것인지 독자적인 민중 후보를 준비해야 하는지를 둘러싸고 갈등을 겪게 됩니다. 동시에 1991년의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와 지속적인 탄압 속에서의 인적 자원의 손실은 노선의 분화 속에서 노동운동의 역량과 다른 부문 운동의 역량이 결합하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특히나 91년의 서울사회과학연구소 사건과 같은 연구자들에 대한 탄압 사건,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에 대한 탄압 사건, 사회주의노동자동맹에 대한 탄압 사건 등은 ‘선진 노동자’의 전위화와 독자적인 정치세력화 시도를 분쇄하였습니다.

 이어 1993년에는 문민정부를 표방하는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였지만,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은 여전히 유지되었습니다. 지속적인 현장에서의 정치 투쟁에 대한 탄압과 ‘운동권’의 축소 속에서 전위적 노선과 개량적 노선 사이에서 갈등하던 전노협은 민주노조들을 대표하는 또 다른 조직인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의 창설과 더불어서 민주노조진영 전체를 대표하는 역할을 점차 상실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새로운 전국 조직을 위한 노력 속에서 1995년에는 민주노총으로 민주노조 진영의 전국 단위 조직이 통합되었습니다. 이 시기의 투쟁에서는 탄압과 분쇄 속에서도 민주노조 운동에 대한 노동자들의 공감대가 유지되었고, 대학생들 또한 노동운동의 방향에 동조해서 활동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노중기는 이에 대해서 1987년 형성된 노동체제는 ‘한국 노동정치에서 유일하게 노동운동이 정치적 주도권을 쥐었던 시기’(노중기(2020), 「한국 사회의 종속신자유주의 노동체제에 관한 연구」, 경제와사회 127, p.110.)라고 이야기하며, 지배블록의 노동 없는 민주화라는 프로젝트와 민주노조의 민주화의 충돌로서 이 시기를 독해합니다. 이러한 충돌에 대응하여 지배블록은 민주노총을 대화상대자로 인정하는 개혁조치와 더불어서 신자유주의적 노동시장 개혁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추진하고자 하였고, 이는 1996년의 노동법 날치기 사태에서도 드러납니다.

1997 외환위기라는 기점 : 종속적 신자유주의의 정립


 민주노총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총파업을 통해서 대응하였습니다. 1996-1997의 총파업은 단일의제를 중심으로 구성된 전국적 총파업으로 민주노총을 한국 노동운동의 대표적인 세력으로서 부각시키게 되었으며, 다소 유보적이기는 하지만 정부의 노동법 개정 강행을 억제하는 데에 성공하는 모습으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약간의 승리는 1997년 외환위기와 이어지는 구조조정 속에서 무너지게 됩니다. 겨울에 들이닥친 경제위기는 민주노총의 승리에 기반한 임금인상투쟁을 구조조정 저지에 대한 수세적 투쟁으로 전환시키도록 강제하였고, 1999년 노동절에는 구조조정 반대가 주된 요구로 떠올랐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상황 속에서 11월에 민주노총이 합법화되었고, 양대 노총 체제가 확립되게 되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한국 자본주의의 축적 체제의 변동과 산업 구조의 변동 속에서의 노동 구조의 변화는 비정규직의 확산, 노동 유연화로써 노동자들 사이의 구분선을 그었고, ‘노동의 분절’ 속에서 노동자 계급의 단일 대오를 점차 불가능하게 변화하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앞서 살펴본 노중기의 연구에서는 이러한 변화 이후를 종속적 신자유주의 노동체제의 시기라고 이야기합니다. 신자유주의 대동맹이라는 헤게모니집단에 의하여 이데올로기적 장이 규정되고, 노동유연화와 시장만능주의가 확산되었지만, 여전히 국가의 프로젝트로서 남아있던 ‘민주화’에 기반한 노사정위원회라는 장치가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이 노사정위는 민주노총을 사회적으로 고립시키는 역할을 맡았으며, 종속적 신자유주의 체제를 존속시키는 특수한 물질적 국가기구로서 작동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서 민주노조운동의 전투적 조합주의는 효력을 상실하였고, 노동운동에 대한 가혹한 탄압은 지속되었습니다. 노동운동 위기론과 귀족노조라는 이데올로기는 이러한 상황을 보여줍니다.

 김대중-노무현의 21세기 초반의 신자유주의화는 이명박-박근혜로도 이어지지만, 이 과정에서 ‘선진화’라는 미명 하에서 점차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은 강화되는 양상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민주화’라는 외피를 달고 진행되던 노동개혁에서의 정치적 교환, ‘사회적 대화’가 폐지되고 자본주의 사회적 모순이 심화되면서 노동운동의 입장에서는 더 선명한 노선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또한 노동운동, 당 중심의 운동과 노동조합운동은 모두 사회운동과 연대해서 작동하기 시작하였고 이는 2016년 탄핵정국의 촛불집회를 민주노총이 촉발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이 결과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마냥 긍정적인 것으로서만은 독해될 수 없을 것입니다. 진보정당 운동의 침체와 왜곡 그리고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탄압의 지속과 국제분업구조 속에서의 노동자들의 빈곤화 경향, ‘신냉전’과 ‘무역전쟁’ 등으로 표출되는 국제 연대의 어려움은 여전히 노동운동이 위기 속에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 사회운동과 학생이라는 주체에 대하여


 정리하자면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노동운동은 제3세계에서 나타나는 민족해방운동과의 결합과 80년대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과는 시차를 가지는 급진화, 활성화를 거쳐서 발전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 ‘박정희 신화’로 요약되는 냉전, 분단 구조에서 구성된 발전주의 국가는 그 자신이 만들어낸 모순 속에서 무너지게 됩니다. 이에 체제의 위기에 마주해서 폭력을 통해 권력을 독점하며 출발된 신군부는 위기 속에서 구성된 체제의 불안정성에 따라서 성장해온 자본가들, 보수야당 세력과 함께 체제 변환을 구성해야만 했습니다. 이에 87년의 형식적 민주화는 3당 합당이라는 결실로 이어지게 되고, 통치의 합리화, 선진화라는 기획 속에서 신자유주의적 제도들이 한국 사회에 도입되게 됩니다. 이는 한국 사회 내에서의 모순의 집적과 국제적 규모에서의 자본주의의 위기 속에서 1997년의 외환위기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노동운동의 흐름은 이러한 과정 속에서 독립성을 성취하기 위하여 ‘때늦은 열정’ 속에서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이는 세계체계 속에서의 한국 사회의 특수성에 기반한 것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앞으로의 노동운동은 어떠한 방식으로 전개되어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합니다.

 21세기 이후로도 지속된 신자유주의 체제의 확장 속에서 한국 사회는 2010년대 제1세계와의 동일시를 강화해왔습니다. 하지만 노동운동의 역사성과 그 왜곡의 양상은 제1세계의 흐름을 단순히 우리에게 이식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노동운동은 우리가 지나온 역사에 따라서 만들어진 특수한 토양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앞선 노동자 전위 조직의 시도, 급진 노동운동의 시도들과 민주노총의 사회적 대화 속에서의 투쟁, 사회운동과의 결합을 모두 상속받아서 앞으로의 노동운동을 상상해야 할 것입니다. 전위적 노선들의 시도와 독자적인 민중 후보 시도로 대표되는 당 중심의 노동자 계급의 정치화 시도와 민주노조운동의 유산을 이어받아 민주노총의 건설로 이어져온 노동조합 중심의 노동운동의 시도가 모두 난항을 겪어온 상황에서 시민을 중심으로 하는 신사회운동과 각 부문 운동과의 연결성을 창출할 수 있는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비롯한 새로운 전술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이용해야 하는지는 여전히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또 하나 생각해야 하는 지점은 학생과 노동자의 결합이 90년대의 마지막 결합 이후로 상실되어버린 듯한 모습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노동운동의 성장과 사회주의의 성장 속에서 형성되어온 노동운동의 문법을 수입하고 또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함께 이야기하던 학생 주체는 대학의 신자유주의적 구조 개편 속에서 자신의 앞길을 찾아서 나아가야 하는 자기 경영의 주체로서 전환되어 버린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학교에서 보듯이 노동의 문제는 우리의 문제로서 주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학생과 노동자들의 연결성을 다시 구축하고, 학생의 역할은 무엇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사고하는 일은 노동절을 맞이하는 예비 노동자, 예비 지식인인 학생들에게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오늘날의 노동 의제에 대한 발제를 보면서 더 이야기 나눌 수 있겠습니다.

‘다시 찾은 노동절’, 무엇이 달라졌는가


 2026년을 기점으로 ‘근로자의 날’이었던 5월 1일이 ‘노동절’로 이름이 바뀌고, 법정공휴일로 지정되었다. 이재명 정부는 자신을 ‘친노동 정부’로 자임한다. 민주노총 위원장 출신의 고용노동부 장관을 임명하고, 123대 국정과제로 ‘일하는 모든 사람이 건강하고 안전한 나라’, ‘노동 존중 실현과 노동기본권 보장’, ‘차별과 배제 없는 일터’ 등 노동 관련 과제를 제시했다. 정부는 또한 근로시간 단축과 근로감독 강화를 추진하고 있고, 불안정한 환경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포괄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일하는 사람 기본법」을 제정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친노동'적 흐름이 모든 노동자들의 실질적인 권리를 보장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모든 노동자의 노동기본권이 보장될 수 있는지, 하청노조의 원청 교섭이 실제로 가능해졌는지에 대한 질문이 필요하다. 이번 발제에서는 우리 사회에서 남아 있는 주요 노동 현안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불안정 노동의 확산


 불안정 노동의 확산은 세계화, 금융화, 정보화, 서비스화와 함께 일어났다. 1990년대 전후, 기업은 시장 변화에 대응하겠다는 명목으로 기존의 안정성이 보장된 고용을 줄이고 노동력이 필요한 특정 기간에만 노동자를 고용하는 불안정한 노동구조를 확산시켰다. 2010년대 이후부터는 디지털 공유경제 플랫폼이 등장하며 플랫폼을 통해 일감을 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근로기준법은 ‘임금을 목적으로 종속적인 관계에서 사용자에게 근로를 제공하는’ 자를 노동자로 판단한다. 그러나 전통적인 사용-근로 관계에서 벗어난 특수고용, 플랫폼 노동자들은 실질적으로 노동자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성을 인정받기 어렵다. 초단시간,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을 온전히 적용받지 못한다.

 특수고용 노동자는 법적으로 기업과 독립적으로 계약을 맺고 노무를 제공하는 개인사업자로 취급되지만, 실질적으로는 기업에 종속된 형태로 노동하고 있다. 이 때문에 최저임금에 미치지 못하는 소득을 벌거나, 갑작스럽게 계약이 해지당할 위험이 있다. 수수료라는 이름의 중간착취도 성행한다. 또한 특수고용 노동자들은 노동에 필요한 비용을 개인이 부담해야 할 때가 많다. 화물노동자의 경우에는 차량 할부값과 기름값, 유지관리비를 사비로 지출해야 한다. 표면상으로는 일한 만큼 자유롭게 돈을 버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발적으로’ 착취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플랫폼 노동자는 특수고용 노동자와 유사한 구조적 착취를 겪는다. 플랫폼 기업은 평판 시스템을 비롯한 알고리즘과 디지털 기술로 업무를 통제하고, 노동자들의 수입에서 수수료를 차감한다. 알고리즘의 작동 방식과 운임 산정 기준은 노동자들에게 공개되어 있지 않고, 기업이 이를 일방적으로 조정할 수 있다. 알고리즘이 요구하는 점수에 맞추기 위한 속도 경쟁은 플랫폼 노동자들의 안전권을 침해한다. 대표적인 배달 플랫폼 기업 배민은 산재 사상자 수 1위를 차지하고 있다.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는 전체 노동자의 약 30%에 이르지만, 이들은 근로기준법의 노동자 보호 핵심 조항인 해고 제한과 야근수당, 연장근로 제한, 연차유급휴가 규정 등을 적용받지 못한다. 실제로는 5인 이상이 노동하는 사업장이지만, 근로기준법을 회피하기 위해 ‘위장 5인 미만’ 사업장을 운영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같은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용역업체 소속으로 전환시키는 ‘사업장 쪼개기’ 나, 사업소득자(프리랜서)로 계약시켜서 서류 상의 상시근로자 수를 줄이는 방법을 사용한다. 사업소득자 위장 계약의 경우는 사업소득세율인 3.3%에서 따와 ‘가짜 3.3’ 이라고도 부른다.

 초단시간 노동자는 1주에 15시간 미만으로 일하는 노동자이다. 주휴수당과 퇴직금을 지급받지 못하고, 4대보험을 적용받지 못한다. 서류상으로 노동시간을 주 15시간 미만으로 처리한 뒤, 추가 노동을 사실상 강제하는 편법을 사용하는 사업장도 적지 않다. 한국어교원 노동자는 주 15시간 미만의 강의 시간만으로 근로계약을 체결한다. 강의 준비, 숙제 채점 등의 강의 외 업무 시간 또한 소정근로시간으로 산정되어야 하지만, 대학 측은 위와 같은 업무를 ‘선택사항'으로 두어 노동시간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2년 이상 일해도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되지 못해 계약이 끊길 불안정성에 놓여 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상당수 노동자들은 법의 보호 밖에 놓여 있다. 2026년,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비임금 노동자들은 약 870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들은 대부분 장시간 노동에도 낮은 임금을 받고,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등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다. 각각의 고용 형태는 한 노동자에게 동시에 적용되어 불안정성을 더욱 심화시키기도 한다. 한국어교원 노동자는 프리랜서로 위장 고용된 노동자인 동시에 초단시간 노동자이다. 기존의 특수고용노동자들은 전용 앱과 알고리즘을 통해 통제받게 되었다.

일하는사람기본법은 불안정 노동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일하는 사람 기본법」은 기존 근로기준법이 포괄하지 못하는 불안정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제안된 법이다. 현재 고용노동부는 「일하는 사람 기본법」을 근로자 추정성을 강화시키는 「근로기준법 일부개정법률안」과 함께 '일법 패키지'라는 이름으로 추진하고 있다.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통해 노무를 제공하는 자를 근로기준법 상 ‘근로자'로 간주하고, 그럼에도 ’근로자'로 인정되지 않은 사람들은 일하는사람기본법을 통해 보호하려는 움직임이다.

 일하는사람기본법은 앞서 언급한 근로기준법 미적용 노동자들을 모두 ‘일하는 사람’으로 규정한다. '일하는 사람'은 "고용상의 지위나 계약의 형식에 관계없이 다른 사람의 사업을 위하여 자신이 직접 노무를 제공하고 이를 통해 보수 등을 받는 사람"으로 정의되고, 노무를 제공받는 사람은 ‘사업자’로 명명한다. 이 관계를 기반으로 기본법은 ‘일하는 사람'의 차별받지 않을 권리, 쉴 권리, 성희롱·괴롭힘 금지, 계약 해지 제한 의무 등을 노력·권장 조항으로 포함하고 있다.

 ’사업자'와 '일하는 사람‘이라는 명칭은 기업과 노동자 간의 관계를 사용-근로 관계가 아닌 동등한 계약 당사자인 것처럼 보이게 하여, 플랫폼·특고·프리랜서 노동자에 대한 실질적인 종속성을 가린다. 함께 패키지로 묶여 추진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의 근로자 추정제는 권리의무를 다투는 분쟁이 발생할 때로 한정된다. 플랫폼·특고·프리랜서 노동자는 일법 패키지가 시행되어도 분쟁을 제기하지 않는 이상 여전히 ‘근로자'로 규정되지 못한다.

 기본법 제정이 아닌 근로기준법 체계내에서의 권리 보장 방식 다양화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비판도 있다. ‘일하는 사람‘들에게 선언적 권리만 보장할 뿐, 각각의 노동 형태에 따른 구체적 보호 조항을 마련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사업자는 일하는 사람의 안전과 건강을 우선하여야 한다‘와 같은 포괄적 권리 보장 조항은 알고리즘의 평가 기준에 의해서 업무 수가 좌우되고, 쉬면 평가가 떨어져 업무를 받기 힘든 플랫폼 노동자의 쉴 권리를 보장하기에는 추상적이다.

노란봉투법과 교섭창구 단일화


 지난 3월 10일, 노동조합법 제2·3조 개정안이 시행되었다. 노란봉투법이라고도 불리는 이 개정안은 전 정부에서도 두 차례 통과되었지만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폐기되었지만, 이재명 정부의 1호 노동 입법 과제로 재추진되었다. 개정법에는 사용자의 범위 확대, 노동조합의 가입범위 확대, 노동쟁의의 범위 확대, 손해배상 청구 제한 조항이 추가되었다.

 노란봉투법의 핵심은 원하청 관계에서 원청의 사용자성 인정, 하청 노동자 및 비정규직 노동자의 원청교섭권 보장과 파업 손해배상 청구 제한이다. 노란봉투법 시행 전, 기업은 노동조합과 조합원들을 상대로 막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었다. 2009년 쌍용자동차가 정리해고에 맞서 공장을 점거하고 파업을 벌인 해고노동자들을 상대로 청구한 47억 원의 손해배상은 해고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생계를 위협하고 정신적 고통을 겪게 하였다. 한화오션이 하청 노조에 제기한 470억 원의 손해배상 소송은 하청 노동자를 고공에 오르게 했다. 손해배상 청구는 노동자들의 파업을 사전에 차단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노란봉투법의 국회 본회의 통과는 하청 노동자들에게 원청 교섭의 희망을 심어 주었지만, 노조법 시행령은 오히려 교섭을 막는 장벽이 되고 있다. 노조법 시행령 개정안은 교섭창구 단일화를 전제로 원청 교섭을 허용하고 있다. 교섭창구 단일화는 복수노조 합법화와 함께 만들어진 제도로, 사업장에 여러 개의 노조가 있을 때 하나의 대표노조를 정해 그 노조만 사용자와 교섭할 수 있도록 한다. 복수노조 합법화는 노동자들로 하여금 노조할 권리를 보장했지만, 교섭창구 단일화는 소수노조의 힘을 약화하여 실질적인 교섭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했다.

 노란봉투법 시행령은 기존의 교섭창구 단일화 문제를 원하청 교섭 문제로도 확대시켰다. 2차 시행령에서 원하청 노조 사이의 교섭창구 단일화 안은 삭제되었지만, 여전히 하청 노조 사이에서의 교섭창구 단일화는 필요하다. 한 사업장에서 근로조건이나 직무, 고용형태의 차이가 클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교섭 단위 분리를 신청할 수 있지만, 원청이 교섭 단위 분리에 불복하면 교섭 절차가 중단되어 교섭이 지연될 수 있다. 교섭창구 단일화가 포함된 시행령은 노조법 개정의 의의를 무력화시킨다.

현실에서 드러난 교섭권의 한계


 지난 4월 20일, CU 물류센터에서 물류비 인상과 분류·진열 등의 ‘공짜 노동' 금지를 위해 투쟁하던 서광석 열사가 대체 차량에 치여 사망했다. CU 화물노동자들은 노란봉투법에 근거하여 원청 BGF리테일을 상대로 교섭을 요구했지만, 원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측은 죽음 이후에도 다단계 하도급 구조와 화물연대가 개인사업자로 구성된 법외 노조라는 점을 이유로 들어 직접 교섭 의무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22일 교섭 상견례 직후에도 BGF로지스는 “구체적인 쟁점별로 사용자성이 다르다”며 교섭이 아닌 현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협의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BGF로지스는 화물노동자들을 향해 실질적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하청 운송사와 체결한 계약서에도 BGF로지스가 노동자들의 배송 코스와 점착 시간을 관리함이 명시되어 있다. 노동부 또한 참사 직후 죽음 직후 화물연대가 법외 노조이기 때문에 노란봉투법 적용 대상을 벗어났다는 입장을 내놓았지만, 이내 장관은 종속 관계에 있으면 노동자로 볼 수 있고, 이번 사건은 노란봉투법의 취지가 실현되지 못한 참사라며 정정했다.

 이번 파업과 죽음은 현재 노동자들이 겪는 구조적 문제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편의점 물류 배송 업계의 다단계 하도급 구조 맨 아래에는 특수고용노동자가 있었다. 특수고용노동자는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하여 사실상 하청 노동자의 지위조차 가지지 못하고, 설령 노동자로 인정받는다고 하더라도 원청에 온전한 책임을 묻기 힘들다.

결론



 노동절이 법정공휴일로 지정되었음에도 여전히 5월 1일에도 쉬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많다. 정규직은 약 75%가 유급휴일을 보장받았지만, 비정규직은 48%, 특수고용 노동자들은 40%만 유급휴일을 보장받았다. 법의 사각지대에 있는 노동자들에게 노동절은 다른 날과 차이가 없는 날이다. 이주노동자 역시 고용허가제의 사업장 변경 제한과 근로감독의 부재 속에서 권리를 주장하기 힘들다. ‘다시 찾은 노동절'은 아직 모든 노동자들의 노동절이 아니다.

 정부의 다양한 노동 정책과 입법 시도에도 불구하고, 공권력은 여전히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하려 하지 않는다. 해직교사 지혜복 복직 연대 시위에 참가했다가 연행된 고진수 세종호텔 지부장과 그로부터 사흘 뒤 물류센터에서 사망한 서광석 열사까지, 공권력은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구속하고, 죽음으로 내몰기까지 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노동권에 대한 억압이 아직 작동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노동자들의 권리는 법의 제정만으로 보장되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노동법도 노동자들의 지난한 투쟁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고, 자본과 공권력은 노동자들을 그나마 만들어진 법의 사각지대로 몰아넣어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게 한다. 노동권의 문제는 제도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것을 실제로 작동하게 만드는 힘의 문제이다. 그 힘은 노동자들과 학생을 비롯한 다양한 주체들의 행동과 연대 속에서 형성될 수 있다. 정부가 지정한 지금의 ‘노동절'에서 머무르지 말고, 우리의 힘으로 노동절을 다시 찾자.

참고 자료


노동절에 대하여
  • 이황미, [거슬러보면] 노동절을 누가 언제 되찾았는가, 노동자역사 한내 https://www.hannae.org/bbs/board.php?bo_table=newsletter&wr_id=154

세계 노동운동의 역사
  • 김금수(2013, 2020), 『세계노동운동사』 시리즈, 후마니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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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킴 무디(1999), 『신자유주의와 세계의 노동자』(사회진보를 위한 민주연대 역), 문화과학사.

한국의 노동운동
  • 강만길 외(2004), 『한국노동운동사』 시리즈, 지식마당.
  • 안승천(2002), 『한국 노동자 운동, 투쟁의 기록』, 박종철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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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광일(2008), 『좌파는 어떻게 좌파가 됐나』, 메이데이.
  • 노중기(2020), 「한국 사회의 종속신자유주의 노동체제에 관한 연구」, 경제와사회 127, pp.95-133.

‘다시 찾은 노동절’, 무엇이 달라졌는가
  • 노동과세계, 플랫폼 노동자도 노동자로 인정하라! 배달플랫폼노조 대구지부 현철관지부장 인터뷰 https://worknworld.kctu.org/news/articleView.html?idxno=504636
  •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알고리즘 통제와 플랫폼 노동자의 정신건강, https://workingvoice.net/posts/eVtM5oE
  • 한국노동사회연구소, 특수고용노동자들은 어떻게 스스로를 착취하게 되었나, http://klsi.org/bbs/board.php?bo_table=B07&wr_id=1821
  • 시민언론 민들레, 검사 출신이 세운 편의점 왕국 CU와 노동자의 죽음, https://www.mindl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9854
  • 매일노동뉴스, “수업준비도 노동시간” 초단시간 굴레 갇힌 한국어강사들, https://www.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33900
  • 참여연대, 일하는 사람 기본법의 의미와 조건, https://peoplepower21.org/welfarenow/2020006
  • 민주노총, 2026 세계노동절대회 교육지, https://nodong.org/data_paper/7927234
  • 엄진경, 일하는 사람 기본법 비판,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https://workright.jinbo.net/xe/issue/90061
  • 매일노동뉴스, “권리보호 마중물” vs “차별 고착화” 일하는 사람 기본법 여전한 ‘갑론을박', https://www.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33725
  • 매일노동뉴스, “근로기준법으로 모든 ‘일하는 사람' 보호해야, https://www.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33935
  • 한겨레, [사설] 하루 만에 말 뒤집은 CU, 책임 있는 자세로 교섭 임해야, https://www.hani.co.kr/arti/opinion/editorial/1255801.html
  • 경향신문, “노동절 유급휴무는 그림의 떡” 노동법 밖 노동자 10명 중 6명 근로기준법 적용 확대 촉구, https://www.khan.co.kr/article/202604261510001#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