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성명: 우리는 더 민주적인 사회를 원한다 

참정권 침해한 선관위의 ‘투표용지 부족’ 사태 규탄하며


 지난 6월 3일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일부 투표소의 용지가 부족한 전례없는 사태가 발생했다. 20곳이 넘는 투표소에서 투표가 지연됐고, 일부 시민들은 최대 4시간 동안 줄을 서야 했다. 선거관리위원회의 대응 과정에서도 혼선이 있었다. 선관위는 예상보다 높은 투표율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고 해명했지만, 시민의 참정권을 보장해야 할 국가기관의 설명이라고 하기에는 무책임하다. 이후 선관위의 투표 수요 예측 실패와 비용 절감 중심의 행정이 원인으로 제시되고 있다.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절차를 관리하는 기관이 시민들의 투표권 행사에 혼란을 초래한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무능한 행정이다.

 더하여 선관위가 부정선거 의혹에 대응한다는 이유로 투표용지 출력 비율을 낮게 설정한 사실이 드러났다. 2018년 지방선거에서는 ‘선거인 수의 70%’로 정해졌던 투표용지 인쇄 물량 하한선이 이번 선거에서는 50%까지 떨어졌다. 음모론을 의식한 행정이 정작 투표 현장의 혼란과 정치 불신을 키운 셈이다. 그러나 동시에 분명히 해야 할 점도 있다. 행정 실패와 부실 관리는 중대한 비판의 대상이지만, 그것이 곧 부정선거의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사실관계에 대한 검증과 책임 추궁은 필요하지만, 확인되지 않은 의혹을 확대 재생산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정치적 적대와 음모론은 민주주의를 강화하지 못한다. 오히려 시민들의 불신을 키우며 민주주의 제도 자체를 무너뜨린다.

 이번 사태에 대해 학생사회 역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각 대학의 총학생회뿐만 아니라 단과대 학생회, 학생 자치 단체들도 성명을 발표해 선관위의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를 요구했다. 정치가 금기시되고 무관심이 일상화된 시대에, 학생 사회가 참정권 침해라는 민주주의의 문제를 공론화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이전에는 참정권 박탈이 없었는지 되돌아 보아야 한다. 이미 사회적 소수자들은 유권자 선택에서부터 기표에 이르기까지 투표의 전 과정에서 일상적으로 배제되어 왔다. 지난 30일 고양시에서는 앞이 잘 보이지 않고 거동이 어려운 유권자가 투표를 거부당한 일이 있었다. 보조인과 함께 기표소에 들어갈 수 있음에도 현장에서 제지당한 것이다. 지난 총선때는 투표소에 엘리베이터가 없어 휠체어 이용자가 들어가지 못했다는 신고가 잇따랐다. 이 같은 장애인의 투표권 침해는 투표소의 물리적 접근성에만 머물지 않는다. 점자 공보물의 부족으로 시각장애인은 후보자의 정책과 공약을 충분히 확인하기조차 어렵다. 한편, 수입 감소와 배차 불이익의 압박으로 투표를 포기하는 특수고용·플랫폼 노동자들과, 법적 성별이 드러나거나 모욕을 당할 것을 우려해 투표에 참여하지 못하는 트랜스젠더들도 있다.

 더욱 큰 배제와 차별은 선거민주주의라는 틀 바깥에서 일어난다. 과연 우리의 정치는 부당해고에 복직을 요구하는 노동자, 동료의 영정을 들고 산재사고에 대한 책임있는 대응을 요구하는 노동자, 일상에서의 차별과 혐오를 멈추기 위해 차별금지법을 요구하는 소수자, 전세사기 대책을 요구하는 세입자, 공공개발 이행을 요구하는 주민들의 정당한 목소리에 응답하고 있는가? 주권은 단지 투표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라면, 그 뿌리는 시민들의 목소리이다. 민주주의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가난하다는 이유로, 성별과 성적 지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침묵당하지 않을 권리를 갖는다. 이는 자신의 목소리를 말하고 사회적 의제를 형성할 권리이다. 

 투표 용지 부족 사태와 선관위의 부실한 대응을 규탄하며, 학생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바람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로 인한 당혹스러움과 분노를 고작 음모론으로 허비해서는 안 된다. 투표의 현장에서 소외되고 침묵당하는 구성원들의 아픔에 연대하는 목소리로 이어나가자. 소수자의 권리에 대한 배제를, 턱없이 비싼 집값과 높은 물가를, 학교와 일터에서의 경쟁과 스트레스를, 차별과 혐오를 해결하기 위한 정치를 시작하자. 정치에서 누락되는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드러내며, 우리의 삶에서 시작한 대안을 고민하자. 더 민주적인 사회는 선출된 대표자들이 아니라, 커다란 정치에서 소외되는 요구들을 통해 실현될 것이다.

2026년 6월 6일 

경기대학교 퀴어 동아리 ‘다다름’, 경기대학교 학생운동 동아리 '경기를 일으키다', 고려대학교 정치경제학연구회 ‘수레바퀴’, 돌곶이포럼, 동국대학교 맑스철학연구회, 비정규직 없는 서울대 만들기 공동행동(비서공), 사회학과 학생자치연합단체 ‘소큐스’, 서강대학교 인권실천모임 ‘노고지리’, 서울여자대학교 노학연대 ‘청새치’(준), 성균관대 학생실천 네트워크 모꼬지(인문사회예술독서회, 여성주의 교지편집위원회 정정헌, 정치경제학회, 성소수자모임 퀴어홀릭, 장애인권법·정책동아리 EQUAL), 성신여자대학교 행동하는 퀴어/성소수자동아리 ‘큐리즘’(Qrism), 숭실대학교 사회참여 소모임 ‘틈새’, 실천하는 국민대 학생모임 '비상구', 중앙대학교 인권네트워크, 학생사회를 바꾸는 활동가 네트워크 ‘작당모의’, 한국외국어대학교 마르크스 정치경제학회 ‘왼쪽날개’, 한신대학교 민중가요 중앙노래패 ‘보라성’,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육권・노동권・성인권 특별위원회 ‘미대의외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