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대학 학부생 주도 집담회 ‘끝나지 않은 12월: 한국, ( )로 읽다’ 발제문

식민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역사를 통해 본 계엄과 노동자운동
저자: 비서공 집행위원 이재현(서양사학과)
노학연대 활동을 이어온 비정규직 없는 서울대 만들기 공동행동(비서공) 활동가로서, 그리고 서양사학과 학부생으로서 본 발제를 맡게 되었다. 그렇기에 지난 계엄과 이후의 사회운동에 대해 역사적 맥락을 짚고, 동시에 노동권과 결부된 차원에서 향후의 과제를 이야기해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본 발제는 의제로서의 노동자운동, 그리고 학문 분과로서의 역사학에 대한 전문성 있는 연구나 분석의 결과가 아니며, 발제자의 개인적 의견을 개진한 것에 가깝다. 많은 분이 느끼실 부족함에 대해 미리 양해를 구하며 발제를 시작하고자 한다.
‘신자유주의 통치성’, ‘내전’을 통해 지배하다?
2024년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2021년 작 『내전, 대중 혐오, 법치: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는 한국의 사회운동에서도 널리 읽혔다. 해당 저서에서 프랑스의 ‘신자유주의와 대안 연구그룹’ 소속 저자들이 제시한 키워드 ‘내전’은 오늘날 한국에서의 계엄을 지구적인 맥락에서 이해하는 데 여러모로 도움을 준다. 신자유주의를 특정한 정치경제 질서로 이해할 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의 종언이란 진단은 타당할 수 있지만, 저자들은 푸코의 통치성 분석을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에 접합해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지배가 오늘날까지 장기적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극우 포퓰리즘’ 등의 현상 또한 이를 바탕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개념의 다의적 사용으로 인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먼저 해당 저서의 논지를 살펴보자면, 저자들은 시장과 국가, 지구화와 국민국가 사이의 대립을 토대로 신자유주의를 정의하기보다, 시장의 논리가 전제적으로 관철될 수 있도록 사회를 재조직하는 통치성으로서 포착하고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 통치성은 단순히 ‘큰 정부’를 감축하여 시장의 영역을 내주는 경향이라기보다, 시장의 영역에서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공격적으로 국가기구의 권력을 사용하여 ‘평등’에 대한 다양한 기획을 무력화하고(다르도 2024: 58-101), 더 나아가 국가의 행정까지도 경영적 ‘효율성’의 논리를 내재화시키는 지배의 방식이다. 저자들은 신자유주의의 초기 역사에서부터 상호모순적이기도 한 그 다양한 이념적 기원과 전개를 개괄하며, 경제 영역의 ‘탈정치화’를 위해 역설적으로 강력한 정치적 공격성을 강조해 온 그 일관성을 포착하고자 한다(다르도 2024: 126-149).
그러한 신자유주의 통치성은 노동의 불안정화 등을 통해 개인화된 경쟁을 내면화시키면서도 ‘선택’과 ‘자유’ 등으로 이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고자 시도한다(다르도 2024: 226-228) 동시에 파편화 속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불만에 대응하기 위해 능동적으로 혐오 등을 활용하여 반민주적 정치를 펼친다. 현대 세계에의 적응과 전통 가치의 수호, 지구화와 국민국가 등에 대해 신자유주의 통치성 내에서도 다양한 대립이 나타나지만, 신자유주의 통치성이 전통적 가족이나 ‘경제주권’을 강조할 때에도 궁극적으로 ‘대중 혐오’에 기반해 시장과 경쟁의 질서를 민주주의적 의사결정의 영역 바깥으로 자리매김하려 시도한다는 점이 강조된다(다르도 2024: 198-201). 오늘날 미국의 트럼프나 브라질의 보우소나루 등은 글로벌 금융자본에 대한 분노를 활용하면서도 자본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데 정치적 폭력을 행사하고, ‘전통’에 호소하는 담론을 구사하면서 젠더적・인종적 혐오를 격화하면서도 ‘기업가적 개인’을 옹호한다. 저자들의 입장을 채택한다면 이러한 근래의 ‘극우 포퓰리즘’도 ‘포스트-신자유주의’라기보다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한 변형인 셈이다.
저자들은 오랫동안 신자유주의의 기원으로 간주되어 온 1973년 칠레에서의 쿠데타를 비롯해 다양한 역사적 사례들을 통해 그러한 신자유주의 통치성이 분할된 인민 집단들 간의 ‘내전’으로 지배를 유지하고 사회적 불안을 해소한다고 지적한다. 시장의 질서를 위해 기본적으로 대중의 개입이 차단되어야 한다는 반민주주의적 사유가 신자유주의 사상에 면면히 흘러왔음을 볼 때, 쿠데타로 칠레의 권력을 찬탈한 피노체트 군부정권이 아옌데 인민연합(UP) 시기의 자율적인 노동자 조직을 파괴하고 새로운 노동 규율을 부과하기 위해 엄청난 국가폭력을 동원했던 사실은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다르도 2024: 34-41). 칠레의 사례와 같은 노골적인 폭력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대중혐오’라는 반민주적 동인으로 폭력적인 국가기구를 능동적으로 동원하며 적대자를 설정하고 그들을 ‘법치’로 단죄한다는 담론은 그 자체로 ‘권위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다고 지적된다. ‘제3의 길’ 등을 통해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지배가 거대정당들로 이루어진 정치 영역의 담론을 포화한 가운데, 전략으로서의 ‘내전’은 인구 집단 내에서 ‘아군’을 동원하여 평등의 기획을 무력화한다. 이러한 ‘내전’은 인구 집단 간의 갈등으로 나타날 뿐 아니라 경영적 합리성을 예찬하는 일터에서는 노동자 개인 안에서 벌어지는 극한의 경쟁과 대립으로 나타나기도 한다(다르도 2024: 239-241).
‘신자유주의’라는 용어의 다의적 범람 속에서 저자들의 분석이 현재의 정치적 대립을 설명하는 데 유의미한지에 대해선 다양한 이견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최근의 계엄과 내란에까지 이르게 된 윤석열 정부의 정책과 담론, 그리고 계엄의 무력화 이후에도 탄핵을 막기 위해 내란의 지속을 촉구하고 있는 정치적 경향은 위의 분석과 많은 부분 겹쳐 보인다. 특히 경제에 대한 민주주의적 기획을 무력화하는 과정에서 노동조합을 ‘기득권’으로 지목하며 ‘법치’를 명목으로 범죄화하고, 동시에 시장 질서를 ‘자연화’하는 과정에서 ‘전통’으로 상상된 다양한 성차별적・인종주의적 가치를 중심으로 극우 대중동원을 능동적으로 해내는 모습에 주목해볼 수 있다. 저자들이 지적하는 경제와 정치의 ‘운명화’(다르도 2024: 320-326)는 윤석열 정권의 반민주성을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민주주의의 ‘위기’와 ‘비국민’ 배제 속에서 이어지는 식민주의
신자유주의 통치성에 대한 이러한 고찰을 현대 세계의 다양한 정치적 격변에 적용해볼 때, 우리는 ‘내전’ 전략을 통한 정치적 기획이 지구적으로 식민주의의 지배 구조와 중첩되며 때로는 이를 이용하기도 한다는 점을 주목해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 통치성이 ‘내전’을 통해 첫 승리를 거둔 칠레 군사쿠데타의 사례에서부터, 라틴아메리카가 놓였던 식민주의적 맥락은 저항과 억압의 중요한 구조를 이룬다. 신자유주의 통치성과 식민주의의 중첩은 역사적으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주변부’에 놓였던 지역에서만 발생하는 일은 아니며, 식민주의적 폭력이 ‘중심부’에서의 국가폭력을 가속화하거나 정당화하는 되먹임 작용을 일으키기도 한다. ‘신자유주의와 대안 그룹’의 저자들도 지적하듯이, ‘치안’을 중심으로 동원되는 국가폭력의 기술은 알제리나 인도차이나에서의 식민주의 전쟁 및 20세기 후반 ‘테러와의 전쟁’을 통해 발달한 이후 ‘중심부’의 파업이나 대중봉기에 대해 노골적인 전시의 진압 기술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다르도 2024: 257-261).
오늘날 우리는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의회민주주의 국가들에서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에 대해 시위 자체가 범죄화되는 등 기본권의 박탈이 법제화되는 현상을 목도하고 있다. 이는 정착식민주의와 집단학살의 일상적인 폭력성이 지구적으로 민주주의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줌과 함께, 기본권 보장에 있어서 ‘선진적’이라고 간주되는 서구에서 민주적 권리 박탈과 국가폭력의 정당화가 ‘예외성’을 일상화하며 심화하고 있는 정치 현실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민주주의의 선형적 ‘진보’라는 서사에서는 이례적인 위기로 간주될 수 있는 이러한 현상은 우리의 기억에서 은폐되었을 뿐 역사적으로 결코 비일상적인 경향이 아니다. 불가해한 것처럼 보이는 서구 민주주의의 ‘위기’를 민주주의의 역사 속에 맥락화할 때, 식민주의 지배의 구조가 항상적으로 국가폭력에 기입되어 있었음이 보다 분명해진다. 20세기의 가장 잔혹한 식민주의 전쟁 중 하나였던 알제리 전쟁이 이어지던 중, 1961년 파리에서 알제리 이주민들을 대상으로 자행된 경찰의 학살은 탈식민화를 저지하려는 먼 지역에서의 폭력이 식민 ‘모국’에까지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생생히 증언한다. 경찰이 학살당한 이주민들의 시신을 센강에 던짐으로써 은폐한 이듬해, 샤론 지하철역에서 반전평화운동을 벌이던 프랑스공산당(PCF)과 노동총동맹(CGT) 시위대를 대상으로 다시 학살이 이어졌다. 식민주의를 되물림하는 가운데 ‘비국민’ 으로 상정되어 내전의 대상이 된 이들은 이주민에 국한되지 않았던 것이다(노서경 2017: 264-273).
알제리 전쟁의 시간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식민주의 전쟁을 지속하고자 하는 프랑스 군내 세력의 성장과 극우파의 폭력은 ‘모국’에서 제4공화국을 붕괴시킨 정치 위기를 야기한 바 있다. 한편 전쟁 이후 1980년대 ‘기억의 정치’에서, 과거 학살의 가해자였던 전 파리시 경찰국장 모리스 파퐁이 1940년대 초 비시정부의 관료로서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적극적으로 부역했던 사실이 폭로되며 언론과 역사학계에서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이재원 2021: 91). 이는 자연히 21세기까지 식민주의와 파시즘의 관계에 대한 재조명으로 이어지게 됐다(권윤경 2015: 379-388). 역사적 현상으로서 ‘파시즘’을 명확하게 정의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명확한 것은 파시즘의 폭력에 사용된 다양한 논리와 기술이 비서구 지역에서 식민주의를 통해 실험되다 유럽에서도 적용됐고, 파시즘의 폭력이 지닌 속성들이 전후 세계의 정치에서도 결코 단절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식민주의, 파시즘, 신자유주의 통치성 등은 자체의 독립적 성격을 지닌 현상들이며 동일한 지배의 개념으로 환원될 수 없지만, 구체적 폭력에서 나타나는 논리와 기술의 연결성과 연속성을 간과할 수 없다.
파시즘과 제국주의 이후의 질서가 고민되던 전후 세계에서 냉전이 부과한 굴절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탈식민화는 하나의 대세가 되었으며 ‘제3세계’라는 범주는 ‘지구적 남반구’를 아우르는 대규모의 운동으로 실체화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절멸적인 집단학살에 놓인 팔레스타인은 당시부터 전후질서의 공백으로 생각되었다. 이는 세계 사회운동에 베트남만큼이나 중요한 상징성을 지녔던 팔레스타인인들의 장기적 투쟁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민족자결권’이 ‘독립 국가’로 실체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며, 국민국가로 이루어진 국제질서에서 다루어지기 어려운 문제로 간주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권국가라는 틀과 그 틀을 통해 주조된 ‘국민’들에 권리가 부여된다는 매끈해 보이는 질서는, 국민과 비국민을 분할하며 자행되어 온 폭력을 쉽게 비가시화한다(장석준 2023). 식민주의, 파시즘,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내전’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재생산되어 온 ‘국민’과 ‘비국민’의 분리는 전후 세계에서 이어지는 국가폭력을 비가시화하며 작용했다.
‘민족자결’을 둘러싼 지구적인 주체화가 러시아혁명을 계기로 본격화한 이후, 식민주의는 다양한 기제를 통해 식민제국의 구성원으로서 동질적인 집단을 생산하고자 노력함과 동시에 인종이나 이념을 비롯한 다양한 경계를 기반으로 ‘비국민’을 정의하며 포섭하거나 분리하여 배제하는 기술을 발전시켜왔다. 이는 전후 냉전적 반공주의의 맥락과 결합하며 탈식민 지역에서 자행된 대규모 집단학살과 국가폭력의 근원이 됐다. 아울러 심층적인 지구적 불평등에 대항해 온 반식민 해방운동의 열망이 독립적 주권국가의 수립으로 협소하게 가두어지면서, 팔레스타인이나 서사하라를 비롯해 국가를 갖지 못한 인민들은 빠르게 공론장의 관심에서 밀려났다. 새로운 ‘독립 국가’의 ‘국민’ 주조 과정에서 식민주의의 상흔이 남긴 다양한 폭력이 재생산되기도 했다. 흔히 그러한 신흥 국가의 정치적 혼란과 폭력을 정치발전상 ‘후진성’의 소산으로 간주하기도 하지만, 식민주의의 장기적인 지속이라는 역사적 맥락과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지구적인 ‘내전’이 중첩되는 현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리라 생각한다.
역사적이고 지구적인 맥락에서 바라본 한국의 계엄과 내란
다시 한국에서의 계엄으로 초점을 되돌려볼 때, 우리는 역사적으로 계엄의 식민주의적 맥락을 우선 상기해볼 수 있다. 해방전후 제주에서의 절멸적 집단학살을 비롯한 반공주의적 국가폭력은 기본적으로 일제 식민주의에서 ‘반체제적’ 사회운동과 요구를 대상으로 하여 구성된 ‘비국민’ 담론을 적극적으로 차용했다. 1948년 여수・순천 항쟁을 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계엄법 제정 이전에 초법적으로 선포된 첫 계엄령도 탈식민 요구에 대한 배제와 절멸이란 성격을 지녔다(노영기 2019: 215-242). 한편 1980년 5월 비상계엄 전국확대 이후로 광주에서 자행된 계엄군의 폭력과 당시 군지휘부의 베트남전쟁 참전 경험 사이의 연관성을 지적하는 논의들은(김정한 2020: 63-85), 한국의 국가기구와 자본주의가 고도화된 이후의 폭력에 대해 보다 지구적인 식민주의의 맥락에서 바라보도록 한다. 오늘날 우리는 한국의 국가와 자본이 팔레스타인에서의 정착식민주의와 집단학살 가해에 중장비와 무기를 수출하고, 동아시아 지역 곳곳의 노동 착취와 생태적 재난에 깊이 연루되어 있는 모습을 목도하고 있다. 피식민 국가로서의 역사적 연속성 위에서 새로운 ‘가해’의 구조에 연루된 우리에게 식민주의적 폭력의 되먹임이 지닌 위협은 너무나 쉽게 망각되고 있다.
동시에 ‘내전’ 전략을 중심으로 한 신자유주의 통치성에 대한 분석을 수용할 때, 역사적인 계엄과 국가폭력의 사례들을 지구적인 맥락에서 자리매김해볼 수 있다. 유신체제 말기의 자생적 노동자운동과 부마항쟁 등의 저항은 70년대 발전국가 축적체제의 위기와 떼어놓고 볼 수 없는데, 이는 전 사회의 자원을 병영적으로 총동원하는 가운데 자본주의와 국가기구를 고도화한 박정희 정권의 통치가 경제적 차원에서, 그리고 국제적・국내적 정당성의 차원에서 한계에 봉착했음을 보여주었다. 그 가운데 1980년 비상계엄 전국확대 이후 5월 항쟁 진압하며 권력을 공고히 한 전두환 정권은 권위주의적 지배하에서 기존 축적체제 위기를 돌파하고자 구조조정과 새로운 경제 운용을 시도하였고, 이는 한국 신자유주의의 중요한 기원이라고 이야기된다(지주형 2021: 111-120). 경제정책에서부터 개인의 문화적 주체성 차원에 이르기까지 전 사회적으로 신자유주의가 전면화한 것은 1997년 경제위기와 후속적인 구조조정 이후의 일이지만, 능동적인 폭력을 통해 사회를 재구성하려는 칠레의 사례가 다양한 권위주의 정권들에 영향을 미쳤던 지구적 맥락에 한국 신자유주의의 한 기원을 기입해볼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역사적인 ‘독립운동’에 대해 ‘민족’적 일면의 부각을 넘어 다양한 저항적 맥락의 교차와 이를 통한 보편적 해방의 재구성에 대해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이와 별개로 윤석열 정부에서 역사를 대상으로 진행해 온 각종 발화는 반식민적 저항이 지닌 현재적 의미를 무력화하고자 시도하며 식민주의의 장기적인 지속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일깨웠다. 아울러 노동조합을 경제적 위기의 원인으로 호명하며 ‘국민’으로부터 분리하고 배제하거나, 성차별적이고 인종주의적인 혐오 등에 기대 계엄 이후에도 탄핵 촉구 시위를 적대시하는 모습은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내전’ 전략을 극한적으로 드러내는 듯 보인다. 이에 대한 오랜 저항의 역사를 쌓아온 한국의 노동자운동은, 계엄을 막아내고 즉각 퇴진을 관철해내기 위한 전 사회적 투쟁 과정에서 보다 높은 시민적 신뢰와 지지를 쌓아나가게 됐다. 이제 노동자운동은 다양한 신체와 정체성을 지닌 존재들과 마주치며 가능케 된 혁신을 토대로 ‘내전’을 넘어 민주주의를 재발명하기 위한 사회적 세력과 대안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내전’을 넘어 권리와 민주주의를 재발명하기 위한 노동자운동의 과제
이를 위해 그동안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지배가 ‘자유’를 명목으로 재조직화해 온 노동의 다양한 형태에 대해 주목이 커지고 있다. 전통적인 이미지로 상상되어 온 ‘계급’이 동일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음을 인정할 때, 우리 주변에도 만연해진 불안정 비정규 노동 속에서 발생하는 사회적인 투쟁에 주목하고 그러한 투쟁 속에서 ‘계급’이 어떻게 새롭게 재구성될 수 있는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국제적인 정치경제의 변화 속에서도 플랫폼 노동의 일상화를 비롯해 노동의 분할과 ‘유연화’ 는 끊임없이 심화되어 왔는데, 이는 노동을 둘러싼 전통적인 권리의 체계와 규범이 지닌 효력에 많은 한계를 부여했을 뿐 아니라(장귀연 2024) 이를 기반으로 한 시민성이 더는 유지되지 못하게 만들었다. ‘공정성’이나 ‘능력주의’를 화두로 한 한국 일터의 다양한 논쟁이 보여주듯 이러한 노동의 재조직이 부과한 개인의 새로운 주체화 형식은 다양한 사회적 혐오의 주요한 원인이 되어오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노동의 재조직이 야기한 파편화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다양한 불안정 비정규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조직화와 투쟁 시도도 이어져 왔다.
이러한 조직화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은 기존 규범의 형해화로 권리 부재 상태에 놓인 다양한 노동자들의 권리 보장에 필수적일 뿐 아니라, ‘내전’의 지배를 종식하기 위해 평등과 민주주의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시민성의 기반을 형성하는 데에도 중요하다. 노동과 결부된 새로운 권리와 규범을 만들어나가는 노력은 기존에 ‘노동자’의 상으로 흔히 상상되지 않았던 다양한 신체와 정체성을 지닌 사회적 약소자들, 이를테면 중증장애인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노동자들의 목소리와 만나는 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다른 한편 노동자운동은 역사적으로 중요하게 맡아온 반식민주의 투쟁의 의미를 재활성화하는 과정에서 최근의 계엄이 위치한 지구적인 폭력의 맥락에 대항해 국경을 넘는 평등의 구호를 더욱 적극적으로 내세울 필요가 있다. 한국의 노동자운동은 최근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해왔는데, 팔레스타인에서의 폭력과 한국에서의 폭력이 연결되어 있다는 자유발언이 남태령을 비롯한 다양한 마주침의 현장에서 자주 들리는 모습은 지구적인 연결의 감각이 시민사회에서 더욱 공감을 얻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물리적인 폭력뿐 아니라 상징적인 무시와 망각에 대해서도 저항해야 했던 팔레스타인 민중의 요구는 그동안 국가를 가지지 못한, 혹은 국가 안팎에서 ‘비국민’으로 간주되어 온 존재들의 외침이 요구해 온 정의와 다르지 않다. 이는 언제나 국경을 넘나드는 연대를 강조해 온 노동자운동의 국제주의적 전통과 맞물릴 뿐 아니라, 특수한 한 ‘민족’의 국민국가를 세우는 데 국한되지 않았던 지구적 반식민운동의 해방적 전통을 상기시킨다. 더욱이 식민주의적 폭력에의 공모가 결국 자국에서의 국가폭력 정당화로 되먹임된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아시아 여러 지역에서의 폭력에 공모하는 국가와 기업을 막아내고자 투쟁하고 이주노동자에 대한 혐오에 대항하는 연대를 조직하는 일은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와 노동권을 쌓아나가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한국의 노동자운동이 식민주의와 권위주의적 지배에 대항하며 쌓아온 역사적 기억과 유산을 새롭게 재해석하고 재활성화하는 일은 사회운동 전반에 대한 중요한 기여로 남을 수 있다. 그동안 민족적 틀과 강하게 결부되었던 노동자운동의 반전평화 요구에 대한 재해석과 재활성화를 통해 ‘국민’과 ‘비국민’을 구분하는 지배에 근본적으로 도전하는 것도 중요하다.
개인적으로 ‘비서공’이라는 단위에서 ‘비정규직’이라는 호명 혹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이란 전망을 중시하는 것은 특정한 고용형태와 관련된 활동에 스스로의 역할을 국한하기 위함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보다 다양한 형태의 불안정노동자들과 연대함으로써 일터와 삶터에서 분할 통치와 혐오에 대항하며 권리와 시민성을 새롭게 구성하는 과정에 참여하고자 하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아울러 단위의 깃발과 팔레스타인 깃발을 함께 달고 집회에 참여하는 이유는, 단순한 ‘인도주의’적인 공감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국가 없는 인민’에 대한 먼 곳의 집단학살을 당장 멈추기 위해 투쟁하는 일이 지난 12월 파업권을 비롯한 노동권을 정지시키고자 시도했던 내란의 국가폭력에 대항하는 일과 연결되어 있다는 관점이 중요하지 않을까.
식민주의의 구조적인 지속과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내전’이 중첩되며 이어지는 가운데 ‘정상적’ 인 ‘헌정’에서 배제되고 권리가 유보된 수많은 존재가 언제나 존재해왔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정상성의 회복’이나 제도적 민주주의의 선형적 ‘진보’ 서사를 넘어 평등한 권리와 민주주의에 대한 언어를 탈환하고 또 끊임없이 재발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노동’을 화두로 한 우리의 시선과 실천이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우리의 정치와 경제, 사회와 삶을 조직하는 방식이 “운명”17)이 아니라는 사실을 실체화하는 평등의 기획이야말로 권위주의에 대항하는 민주주의가 지닌 가장 근본적이면서 급진적인 의미이며, ‘노동’ 및 이와 결부된 권리를 이야기하는 투쟁이 민주주의의 재발명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 보여줄 수 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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