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열사 53주기 기념전시: “2023년, 전태일은 어디에?”

“2023년, 전태일은 어디에?” 전시를 시작하며
■ 전태일, 노동자와 함께 고민해온 그 삶을 돌아보다
전태일 열사는 1948년 8월 26일 대구에서 태어났습니다.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어린 나이부터 생계를 위해 일터에 뛰어들어야 했던 전태일 열사는 17살이 되던 해부터 서울 청계천 가의 평화시장에서 재봉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여공’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여성 경공업 노동자들이 비인간적인 환경 속에서 장시간 노동하며 폐 질환을 비롯한 산업재해에 노출되는 모습을 목도하고, 생명과 안전보다 이윤을 위한 생산을 우선시하던 사회의 부조리를 인식하게 됩니다. 이후 노동조건에 있어 최소한의 기준을 정한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된 전태일 열사는 동료 재단사들과 ‘바보회’, ‘삼동친목회’ 등을 조직합니다. 평화시장의 노동 환경과 산업 실태를 조사하여 노동청에 진정하였지만, 공권력은 무심하게 대응할 뿐이었습니다. 이미 존재하는 근로기준법에조차 무관심한 한국의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기획했지만 결국 경찰의 방해로 무위로 돌아갑니다.
전태일 열사는 섬유산업의 노동자들과 나눔을 실천하기도 하고 법과 제도에 호소하여 현실을 바꿔내고자 하기도 했지만, 권리를 위한 투쟁 없이는 사회가 노동자의 요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큰 결심을 합니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는 스스로의 몸에 불을 붙이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라고 외쳤습니다. 이내 병원으로 후송된 그는 가족과 동료들에게 노동자 권리를 위해 싸워나갈 과제를 남긴 채 22살의 나이에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 전태일의 죽음, 노동조합 조직화와 노학연대의 불씨가 되다
전태일 열사의 삶과 죽음은 많은 것을 바꾸었습니다. 생전에는 전태일 열사의 고발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언론들이 한국의 참혹한 노동 현실을 앞다투어 보도했고, 그의 요구는 제도정치권에도 막대한 파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평화시장의 청계피복노조를 시작으로 많은 사업장에서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이 만들어지며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한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활동가는 청계피복노조 등의 활동에 앞장서며 한국 노동운동의 불씨를 이어나가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냉전과 반공주의 속에서 해방 후의 노동운동이 질식되어간 이후 일터와 삶터의 조건을 스스로 바꿔나가고자 하는 노동자들의 움직임이 전태일의 죽음 이후 다시금 재개된 것입니다.
한편, 전태일 열사의 죽음은 학생운동에 있어서도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열사가 쓰러진 직후 서울대학교 학생들은 성명을 통해 정부를 규탄하고 노동 실태의 조사와 노동자 권리 개선을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그동안 제도적 민주주의의 요구에 집중했던 학생운동은 열사의 죽음을 계기로 그동안 공론장의 의제로 올라오기조차 힘들었던 노동자의 목소리에 주목하며 노동자・학생 연대를 본격적으로 추진해갔습니다.
박정희 유신 정권이 무너진 이후에도 12.12 쿠데타로 군부의 통치가 연장되고, 5.18 민중항쟁이 가혹하게 진압되면서 학생운동은 제도권 정당이나 학생만의 힘으로는 군부독재를 종식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노동운동, 농민운동, 빈민운동, 여성운동 등 다양한 사회운동이 발흥하는 가운데 학생들은 ‘민중’을 주체로 발견하기 시작했고, 광범위한 사회운동과의 결합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노학연대 속에서 학생들은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에 더 자주 결합했고, 많은 학생들이 노동자와 함께 야학 활동을 하거나 직접 노동자가 되어 현장의 노동조합 조직화에 매진하기도 했습니다.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보다 이윤을 위한 생산을 우선시하는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학술적 모색과 문화・예술적 활동도 이루어졌습니다.
■ 80년대에서 2020년대까지, 새로운 길을 찾아
한편 1980년대 중반, 과거 강력한 억압으로 해산되었던 70년대의 민주노조들이 다시금 재건되기 시작했고, 새롭게 고도화된 산업에서도 다양한 노동조합운동이 등장해 노동쟁의가 급증했습니다. 노동조합운동은 저임금과 권위주의적 작업장 통제 등에 대항하는 경제적 투쟁을 벌였지만, 동시에 억압적 노동체제의 구조에 대항하기 위한 정치적 투쟁도 벌여나갔습니다. 군부정권의 비호를 받은 자본의 노조할 권리 억압에 맞서 지역의 여러 노조가 연합하여 파업을 벌였던 1985년 구로동맹파업이 대표적입니다. 이러한 투쟁들은 1987년 6월 항쟁 직후 분출한 7・8・9월 노동자 대투쟁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은 6월 항쟁으로 고조된 민주적 열기를 일터의 일상 속에서 이어나가야 한다는 과제를 제기했으며, 그 과정에서 전국적으로 민주적 노동조합들이 확산되었습니다.
전태일 열사의 삶과 죽음에 큰 영향을 받은 한국 노동운동은 1990년대에 이르러 다양한 변화를 마주해야 했습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압력 속에 사회운동이 퇴조하는 조건 속에서도 노동조합운동은 기업별 노동조합을 산업별 노동조합으로 개편하여 권리를 사회적으로 확장하기 위한 노력을 이어나갔고, 성별이나 학력 및 직종에 따른 임금 불평등을 해소해갔습니다. 그렇게 대안을 위한 모색을 이어온 노동조합운동은 1996~97년 노동법 개악 반대 투쟁(노개투)을 통해 파견법과 비정규직법 도입을 저지하고자 총파업에 나서며 불안정 노동과 간접고용이 만연해지는 사회를 바꿔내고자 투쟁했습니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 이후 대규모 해고를 초래한 구조조정과 민영화 물결 속에서 비정규 불안정 고용이 확산하는 경향을 근본적으로 막아내지 못했습니다.
2000년대 이후 노동조합운동은 전략조직화 사업을 통해 더 열악한 처지에 놓인 간접고용・특수고용・기간제 계약직 노동자들을 노동조합으로 조직하며, 안전하고 존엄한 일터에 대한 책임을 ‘진짜 사장’에 묻기 위한 투쟁을 이어갔습니다. 원청과 하청으로 수직계열화된 산업구조 속에서 기업의 규모와 위치에 따라 양극화된 임금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도 노동조합운동은 다양한 혁신을 이어갔습니다. 그러한 노력 속에서 대학 청소노동자를 비롯하여 그동안 노동조합의 우산 바깥에 있었던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삶을 바꿀 수 있는 힘으로 노동조합을 찾게 되었습니다. 2010년대 및 2020년대에는 여성과 청년의 노동조합 조직률이 꾸준히 증가하기도 했습니다.
■ 다시 돌아온 열사의 기일, 전태일을 다시 찾아보다
전태일 열사가 노동자의 권리를 요구하며 분신한 지 5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사회 여러 곳에선 안전한 일터도, 생활 가능한 임금도, 법에 마땅히 규정된 권리조차도 누리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많습니다. 여전히 매년 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산업재해로 죽어가고 있으며, 5인 미만 사업장의 청년 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조차 제대로 적용받지 못하고 있고, 노조법의 미비함으로 인해 해고 불안 속에 노동조합을 만들 엄두조차 내기 어려운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렇기에 50년 전 전태일 열사의 외침은 지금도 우리에게 유효합니다. 더 열악한 곳에 있는 노동자들과 함께한 전태일 열사, 이번 전시를 통해 오늘날 우리의 일터와 생활 속에서 그 삶의 흔적들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생명을 담보로 한 쿠팡 “로켓배송”, 우리에게 꼭 필요한가요?

‘퀵플렉스’는 쿠팡의 자회사인 쿠팡로지스틱스서비스의 하청업체에서 재하청을 받는 개인사업자를 부르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청과 재하청이라는 복잡한 계약 관계나 얼핏 보면 자영업자를 떠올리게 하는 외양과는 전혀 다르게, 퀵플렉스 기사들은 쿠팡 본사의 물류 업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로켓배송’을 포함해 쿠팡의 택배 물량 대부분을 처리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노동자의 죽음에 대해 쿠팡은, 과로사로 볼 만큼 과도한 노동이 아니라고 주장하거나, 그들이 쿠팡의 노동자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야간근무의 경우 주간근무의 30%를 가산하는 고용노동부 고시에 따르면 주간근무의 기준으로 노동시간이 과도한지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대부분의 물류를 책임지는 노동자들을 하청에 재하청을 거쳐 개인사업자로 위장하여 고용하는 형태는 무척이나 무책임합니다.
쿠팡의 단정적인 주장은 야간노동을 기반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쿠팡이 정작 야간노동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줄 따름입니다.
쿠팡 노동자의 죽음과 쿠팡의 안일한 대처는 하루이틀 일이 아닙니다. 2020년 3월, 새벽 배송 업무 중 사망한 ‘쿠팡맨’에 대해 쿠팡 측은 또다시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죠. 2020년 5월, 물류 작업을 하는 쿠팡 노동자가 오전 2시에 사망했습니다. 2020년 10월, 밤샘 근무를 마치고 귀가한 물류센터 노동자인 장덕준 씨가 사망했고 산업재해를 인정받았습니다. 2021년 1월, 동탄 물류센터에서 보온 대책 없이 일하던 노동자가 심근경색으로 사망했습니다. 2021년 3월, 오후 근무 후 귀가한 구로1캠프 캠프리더가 사망했고, 같은 날 심야 배송을 담당하던 쿠팡맨이 사망했어요.
이처럼 비슷한 인명피해가 계속해서 이어지는데도 쿠팡은 흑자전환 선전에만 몰두하고 있는 셈이죠.
쿠팡의 로켓배송 서비스는 ‘혁신’을 표방하고 있지만 그 실상은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쿠팡은 새벽 배송 노동자들의 ‘수행률’을 측정해 수행률이 낮은 노동자에게서 해당 지역에서의 배송 권한을 회수하기도 해요. 이 때문에 노동자들은 화장실도 가지 못하고 아침 7시까지 쉴새 없이 일할 수밖에 없습니다.
쿠팡은 노동시간 단축과 야간노동의 최소화가 요구되는 기후재난 시대의 흐름에 정확히 역행하고 있는 것이죠.
쿠팡 물류센터의 노동 실상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휴대전화를 반입할 수 없는 물류센터 노동 현장에서는 고용노동부 지침에 명시된 쉬는 시간이 지켜지지 않고, 쿠팡 홍보영상에는 등장한 냉방 시설이 존재하지 않거나 무용지물인 것이 실상입니다.
더 많은 물품을 보관하기 위해 다른 기업의 물류센터와 다른 복층의 ‘메자닌 구조’를 취하고 있어 더 폭염에 취약한 상황임에도, 폭염 대책이라고는 포도당 한 알과 노조가 투쟁해서 얻은 생수 한 병이 전부입니다.
쿠팡은 노동자들의 대부분을 계약직으로 채용하고 있으며, 3개월, 9개월, 12개월 등 일정기간 동안 계약직을 거친 노동자들에 대해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합니다. 무기계약직 전환과 고용 안정을 위해서 노동자들은 부당한 노동환경에도 침묵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렇게 일용직을 많이 채용하는 불안정 고용형태는 노동조합의 결사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결과적으로 쿠팡은 노동조합 조직률이 매우 낮은 기업으로 꼽히게 되었습니다.
쿠팡은 반복되는 노동자 사망 사건에 대해 여전히 책임이 없다는 입장을, 폭염 대책에 대해 최선을 다했다는 입장을, 고용노동부 지침을 준수하고 있다는 입장만을 되풀이하며 노동자의 안전은 뒷전에 둔 채 이윤의 성장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편리함’을 내세운 비대면 서비스와 빠른 배송은 그 뒤에 있는 노동자들을 가리죠.
그런데 위험한 상황에서 작업을 중지할 수 있는 권리, 일터와 삶터의 조건에 대해 의사결정에 참여할 권리, 더 적게 일하고 서로 더 돌볼 수 있는 삶을 추구할 권리는 과연 쿠팡 노동자만의 요구일까요? 우리에게도 필요하진 않나요?
“끊이지 않는 ‘노동열사’들, 누가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나요?

올해 노동절이던 지난 5월 1일, 건설노동자 양회동 열사는 정부의 건설노조에 대한 탄압에 항의하며 분신하였습니다. 고인은 유서에서 ‘정당한 노조활동을 업무방해 및 공갈로 몰아가 자존심이 허락되지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고인의 사전구속영장 청구서에 등장한 ‘피해 업체’ 중 3곳은 실제로 공갈협박을 당한 적이 없다며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을 밝힌 상황이었습니다. 건설노조는 건설 현장의 무리한 시공기간 단축과 안전수칙 위반에 대항해 준법투쟁 등으로 대응하고 있었습니다. 정권의 무리한 수사는 법을 지키기 위해 싸우던 사람을 ‘조폭’으로 몰아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한편 올해 추석을 앞둔 9월 26일, 택시노동자 방영환 열사는 1인시위 도중 몸에 기름을 두르고 불을 붙였습니다. 그는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열흘간의 투병 끝에 끝내 숨졌습니다.
방영환 열사는 자신이 근무하던 택시회사 해성운수 앞에서 완전월급제 시행을 요구하는 1인시위를 227일째 하고 있었습니다. 택시 완전월급제가 법적으로 시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택시회사는 여전히 변칙적인 사납금제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회사측은 사납금제에 기초한 근로계약서를 강요하고, 방씨가 이를 거부하자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월급을 지급했습니다. 집회 중 사장이 흉기를 들고 살해 위협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불법의 현장을 감독해야 할 고용노동부와 지자체, 경찰은 방관했습니다.
50여 년 전 전태일 열사가 분신하며 남긴 요구는, 없는 법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 아닌, 있는 근로기준법을 지켜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50년이 지난 오늘날의 열사들 역시, 있는 법이 지켜지지 않는 현실에 항거하며 투쟁을 이어오다 끝내 세상을 떠났습니다.
건설업계와 택시업계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이미 존재하는 규범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사례가 비일비재합니다.
지금의 법제도가 노동권 보장에 미흡함에도, 현재의 법을 지키라고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현실. 전태일 열사가 부르짖었던 그 외침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울리고 있습니다. 열사가 더는 나오지 않을 사회를 위해 우리 모두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서울대병원의 노동자들,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나요?

직원 중 장애인 의무고용률인 3.6% 기준에 턱없이 미달하여 5년 연속 131억 원의 과태료를 납부하고, 공공기관의 장애인 표준사업장 생산품 구매비율 0.6% 기준에 미치기는커녕 최근 3년간 거의 구매하지 않아 온 서울대병원의 사회적 책임 미비에 대항하는 투쟁이기도 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간호사 1인당 환자 수를 줄이기 위한 간호 인력 충원, 어린이환자의 병원비 부담을 줄이기 위한 제도와 정책 연구검토, 정책에 대한 국립대학병원협회의 대정부 서면 건의 등을 약속받았습니다. 리커버리데이(야간근무 누적 시 1일의 휴가 부여) 도입, 위험업무와 야간업무에 대한 2인 1조 근무를 위해 필수적인 안전인력 충원 등에도 합의했습니다.

인력 충원과 노동강도 완화는 환자와 노동자 모두의 안전을 위해 필수적입니다. 간호사, 시설설비 노동자, 응급환자이송 노동자 등 모든 직종에 인력 충원이 필요합니다.

서울대병원은 선택진료비 폐지에 따라 2016년부터 진료기여수당을 신설했습니다. 그런데 진료기여수당은 환자를 많이 볼수록, 비급여 고액 수술 등 과잉진료를 많이 할수록 수당을 많이 받을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현실을 보면 서울대병원의 평균 진료시간은 5분 36초에 불과했으며, 환자경험조사에서 가장 만족도가 낮은 항목 역시 ‘진료시간 할애’였습니다.
시장화된 비급여 과잉진료를 더욱 유도할 성과연봉제 도입 시도, 오히려 환자의 만족도를 저해하고 건강권을 침해할 우려가 크죠.

국제노동기구(ILO) 역시 정부 지침이 공공기관 단체교섭권을 침해하지 않도록 노동계와 성실히 교섭하라고 권고했죠. 서울대병원과 경북대병원 노동자들, 그리고 다양한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이번 가을 파업에 나서며 노정교섭을 요구한 겁니다.
그래서 2023년, 전태일은 어디에?
2023년 11월, 전태일은 어디에 있는가? 교과서와 기념일과 위인전과 박물관 속에, 50여 년 전 머나먼 과거의 역사적 인물로 박제되어 있는가? 누군가를 위해 거룩하게 희생하는, 그러나 그렇기에 범속한 우리는 결코 따라할 수도 없고 따라서도 안 되는 성자로서 기려지고 있지는 않은가?
하루 24시간 중 16시간을 일해야 했던 여성 노동자들의 현실을 보며, 전태일은 존재하는 근로기준법만이라도 지키라고 외쳤다. 시공기간을 무리하게 단축하며 안전수칙을 위반하라고 강요하고,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불법 하도급 고용구조가 판치는 건설산업에 맞섰던 건설노동자 양회동 열사. 그는 법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노동조합을 ‘조폭’으로 몰아가던 국가의 탄압 속에 목숨을 잃었다. 이미 택시업계에서 사납금제가 불법화되고 월급제가 시행되었음에도 최저임금조차 지급받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택시노동자 방영환 열사는 스스로의 몸에 불을 붙였다. 노동권 보장이 턱없이 부족한 지금의 법제도라도 지키라고 노동자가 분신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현실, 그럼에도 전태일은 먼 과거의 인물일 뿐인가?
중층적인 억압과 노동의 평가절하에 놓인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한 전태일의 삶은, 오늘날 돌봄 노동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싸움의 최전선에 선 서울대병원 노동자들을 생각하게 한다. 필수인력을 충원하지 않아 공공의료를 지탱해온 노동자들의 건강이 위태로워지고, 직무성과급제 시행 시도로 부서 간 협업과 소통이 어려워져 환자의 안전도 위험해지며, 공공부문에 대해 책임져야 할 정부와의 노정교섭도 제대로 제도화되지 못하고 있는 지금, 그럼에도 일주일 동안 시민과 함께하는 파업을 만들어낸 서울대병원 노동자들의 곁에 전태일이 있지 않은가?
2020년 가을엔 쿠팡 대구칠곡 물류센터에서 고 장덕준 노동자가 쓰러졌다. 올해에 2주기를 지내자마자 쿠팡 하청업체에선 두 명의 배달노동자가 쓰러졌다. 모두가 청년을 이야기하고, 또 고령화 속 늘어나는 노인의 삶을 이야기하는 시대다. 그러나 ‘로켓배송’을 위해 장시간 불규칙 노동과 야간노동이 당연시되는 사회에선 청년 노동자도, 노령 노동자도, 건강과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 채 쓰러지고 있다. 누군가의 생명을 갈아 넣으며 무제한적 생산과 소비를 지탱하고 있는 지금의 현실은, 성장을 목적으로 인간과 자연을 무분별하게 소진했던 1970년대와 과연 그렇게 다른가?
그뿐만인가? 전태일의 삶과 죽음이 노학연대의 필요성을 제기한 지 50년이 넘게 흐른 지금, 반복적인 중대재해를 책임 있게 예방하지 않으며 오히려 노동안전을 향한 노동조합의 활동을 탄압해온 SPC그룹, 그 매장과 ‘산학연협력’ 기념 시설들은 서울대학교 내의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전태일의 뜻을 이어받은 민주적 노동조합운동이 오랫동안 성과를 만들어왔음에도, 대학 내 청소노동자와 경비노동자, 단체급식 조리노동자들은 일하다 쓰러지지 않을 권리를 위해 인력충원과 노동환경 개선을 외치며 여전히 싸우고 있다. 노동자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 시민의 생명을 지킴임을 증명하기 위해 기차와 지하철을 멈추는 노동자들은, 원청과 직접교섭할 권리가 사회 전체를 더 안전하게 만듦을 증명하기 위해 국회 앞에서 노조법 개정을 외치는 노동자들은, 여전히 전태일의 삶을 온몸으로 이어나가고 있지 않은가?
이윤보다 생명을 보장하라고 요구하는 사람들, 생산과 재생산의 비용을 누군가에게 전가하며 질주해온 사회를 멈추어야 한다고 외쳐온 그들의 싸움은 오늘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질주하는 속도 앞에 쓰러진 이들의 죽음은 이례적이고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 죽음의 구조를 막고자 하는 이들의 투쟁도 고립되고 개별적인 몸부림이 아니어야 한다. 일하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생명과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민주적으로 노동과정에의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것, 더는 죽음이 이어지지 않기 위해 필수적인 그 요구를 현실화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우리의 요구를 서로와 연결하는 연대의 힘이다.
전태일은 ‘여공’을 연민하여 타자를 위해 시혜하고자 싸우지 않았다. 장시간 위험 노동의 현실을 바꾸어내는 것이 그 자신의, 그리고 모두의 삶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에 투쟁하는 삶으로 나아갔다. 특수고용노동과 플랫폼 노동, 5인 미만 사업장 노동 등에서 근로기준법의 보호조차 제대로 받기 어려운 청년들을 보자. 대학 내 노동자들에 대한 인력 감축과 처우 악화가 생활권 및 교육권의 위협으로 다가오는 학생들을 보자. 노동자의 권리를 위한 싸움은 우리 자신을 위한 싸움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가 연대 속에서 지금보다 덜 일하며 서로를 더 돌볼 수 있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갈 때, 전태일은 투쟁하는 우리의 연결 속에서 과거와 같지만 또 다른 모습으로 끊임없이 다시 나타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