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보훼손 공동대응 전시 참여


지난 대자보 훼손 사태로 학내외 노동자의 권리와 생명에 대한 대자보들도 여러 차례 훼손되었습니다. 2019년 여름 서울대 공대의 열악한 휴게공간에서 돌아가신 청소노동자분과 2021년 관악학생생활관에서 높은 노동강도 속에 돌아가신 청소노동자분을 기억하는 대자보도,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에 맞서다 세상을 떠난 건설노동자 고 양회동 열사를 추모하는 대자보도... 누군가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까지 훼손하려는 시도는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옵니다. 공론장에서 이야기할 자유를 훼손하는 지난 시도는 동시에 노동의 존엄과 주체성을 부정하는 일각의 주장과도 연결되어 있죠. 노동조합이 외치는 청소노동자 사망 사건 재발 방지와 처우 개선 요구가 고인의 죽음을 '이용'하는 것이라던 일각의 주장은, 오늘날 건설노동자의 죽음과 노동조합의 투쟁을 비난하는 사회 일각의 모습에 겹쳐 보입니다. 노동자가 죽음으로 내몰리지 않고 인간답게 일하며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은, 부당한 일터의 현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노조를 통해 집합적으로 개선을 요구해갈 수 있는 존엄한 주체로 노동자를 상상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질 것입니다. 이번 권리의제 단위 대자보 훼손 사태에 대해 12명의 비서공 학생들이 생각하고 느낀 점을 아래에 함께 이야기해보았습니다. 이 대자보를 보는 여러분도 함께 고민을 나누고 또 이야기해주세요.
“열악한 환경 속에서, 높은 노동강도로 인해, 정부의 탄압에 맞서다 죽음을 맞이한 분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대자보가 여러 차례 찢겼습니다. 이는 자신의 일이 아니면 부당한 대우에 맞서 연대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자, 노동자와 노동조합에 대한 혐오이며, 노학연대를 겨냥한 명백한 위협이자 협박입니다. 당신은 대자보는 찢었지만, 우리 모두가 노동을 통해 삶을 영위하고 있기에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우리 모두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찢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노동자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노동조합의 투쟁은 찢을 수 없습니다. 당신의 대자보 훼손에도 불구하고, 노학연대는 찢기지 않을 것입니다.”
“대자보는, 발언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든지 글을 작성하고 인쇄하여 이를 부착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는 공론장의 참여수단입니다. 어느 대자보의 내용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본인의 생각을 담은 대자보로 반박할 수 있는데도, 그러지 않고서 자보를 반복적으로 훼손한 이에게 깊은 유감을 느낍니다. 다만 앞으로 대자보를 붙이고 이를 읽으면서 공동체 속에서 건강한 쌍방의 논의를 이어나갈 여러분이 위축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는 이 공론장의 참여에 대한 위협에 있어 책임을 지길 바랍니다. 그 형태가 자수든, 올바른 공론장 참여 방식에 관한 교훈이든지요.”
“언제부터 대자보가 아무렇게나 찢길 수 있게 되었을까요. 생각해 보면 포스터든, 자보든 붙일 때, 가능하면 다른 이들의 것을 가리는 것을 피하고, 부득이하게 가린다면 시한이 지나버린 것들의 공간을 빌리려 합니다. 가능한 한 게시판이라는 공론장에서 각자의 표현이 보장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곱게 떼어서 버린 것도 아니라, 갈기갈기 찢어놓다니요. 자신의 훼손 행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것일까요? 공론장을 파괴하겠다는 선포가 그 사람의 의견일까요? 노동에 대한 것은 공론장에서 ‘감히’ 논할 수 없는 것일까요? 노동이 언제부터 논해서는 안 되는 것이 되었을까요? 우리의 대다수는 언젠가 노동자가 될 텐데도, 노동이 곧 우리의 삶이 될 텐데도 노동을 왜 이토록 혐오하는지, 말도 못 꺼내게 하는지,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한 장의 대자보가 찢기더라도, 그곳에는 두 장이 붙을 것이고, 그것이 찢기더라도, 다시 자보가 붙을 것입니다. 계속하여 노학연대는 이어질 것입니다. 혐오는, 연대를 넘을 수 없습니다.”
“자유는 모두가 의견을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이루어집니다. 자유를 가치로 삼는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추구하며 다양성을 존중하고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이번에 대자보를 찢은 행위는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다양성을 억압하며 자신의 의견만을 강요하는 철저하게 부자유한 행위였습니다. 그 어떤 억압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코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자보를 훼손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논의에 대한 정당한 반박이라기보다는, 반대 의견을 표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폭력을 사용해서 상대방이 애초부터 말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하겠다는 것에 가깝습니다. 자신의 관점에서 보기 싫은 것을 눈앞에서 죄다 몰아내어 버리려고 한다면 대체 이 세상에 무엇이 남겠습니까? 학교 구성원들에게 알리고 싶은 것, 함께 나누고 싶은 것은 어디로 가야 할까요? 서로에 대한 공감과 관용이 부족해지는 이 시대에, 캠퍼스라는 작은 사회에서마저 폭력과 입막음이 횡행하게 된 것에 대해 깊은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TV에서 박카스 광고를 봤습니다. 사람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각자의 자리를 지켜준 당신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나오더군요. 노동자는 개개인으로서는 나라를 이끌어나가는 ‘산업역군’이라고 칭송받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벗어나 먹고살기 위해, 안전한 일터를 만들기 위해 모여 노동조합을 하는 순간 '간첩', '기득권 카르텔'이라는 소리를 듣는 모순을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그들이 정말로 기득권이었다면, 지하에 있는 습한 중앙도서관의 휴게실, 건설현장의 계속되는 중대재해, 사측의 임금체불은 왜 아직도 존재할까요? 정부의 노골적인 노조 때리기를 통해 우리는 일하는 개개인이 노동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한목소리를 내는 것을 자본이 매우 두려워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자신의 두려움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도 없어 대자보를 훼손한 미약한 당신을 더 강한 연대로 웃어넘기겠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든 자기와 다른 생각, 다른 의견을 보고 싶지 않고 듣고 싶지 않아지는 때가 한 번쯤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느끼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한계가 있는 사람입니다. 인정합시다. 내가 동의하는 의견, 나에게 동의하는 사람들만 접하며 살아간다면 얼마나 편안하겠습니까?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각자 무엇을 믿든, 얼마나 강하게 확신하든, 온 세상이 나와 꼭 같은 생각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이야기합시다. 의견이 있고, 신념이 있고, 확신이 있다면 함께 토론합시다. 나의 의견이, 또는 당신의 의견이, 또는 우리의 의견이, 폭력이 아니라 논의로서 가치 있어 진다는 것을 증명합시다. 자기와 다른 의견이 없어져야만 자기 의견이 가치 있어 진다고 생각한다면, 그러한 의견의 가치란 얼마나 초라합니까? 이야기합시다. 의견이 있다면 그 정도의 용기는 냅시다. 자기 자신에게 그 정도의 존엄은 허락합시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입니다.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모두 다 같은 입장이 아니기에, 반대되는 의견들도 많을 것이고 이번 일은 그런 의견의 차이가 많이 저돌적으로 나타난 거겠죠? 하지만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할 권리가 있기에 자신과 반대되는 입장도 그럴 권리를 가졌다는 것을 기억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입장을 존중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표현의 자유에 대해 공격할 권리는 드리지 않았습니다.”
“표현의 자유는 책임이라는 이름 아래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자보라는 방식은 익명이든 실명이든 공론장 내에 우리의 표현을 천명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표현에 대한 책임을 기꺼이 지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 표현의 자유 자체를 훼손한 행위는 그 책임을 지고자 하는 일말의 의도도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의 무책임한 자유에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꺾이지 않고 언제든 저희의 표현을 해나갈 테니, 더 책임감 있는 모습으로 오시길 바랍니다.”
“대자보를 훼손함으로써 손쉽게 노학연대를 모욕할 수 있으리라는 알량한 발상이 안타깝습니다. 찢긴 대자보로부터 우리는 그 어떤 복잡한 심경이나 깊은 고민도 읽어낼 수 없습니다. 단지 이미 심각했던 노동혐오, 노조 혐오가 날이 갈수록 노골화하고 있음을 실감할 뿐입니다. 이러한 행위가 반복될수록 우리는 노동혐오와 맞서 싸워야 한다는 이 시대의 과제를 더 명확히 인식하고, 더 굳은 의지로 노동자와 연대할 것입니다.”
“대자보는 대학 사회에서 의견을 표명하고 공론장을 형성하는 방법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대자보에 대해 의견이 있으면 그 위에 포스트잇을 붙이거나 옆에 새로운 대자보를 붙여 의견을 교환하고 공론장을 형성해 왔던 것이 그동안 계승되었던 방법인 것입니다. 오늘날 누군가가 대자보를 붙이기 전에 그러한 과거를 알아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 여전히 대자보는 자신의 의견을 대학 사회의 불특정 다수에게 전달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죠. 대자보에 담긴 내용이 아무리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남이 붙인, 다른 사람들에게 읽히기를 원하며 붙인 종이를 찢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특히 학내의 사회적 소수자를 대변하고 권리 증진을 주장하는 단체들의 대자보가 찢겼다는 점에서, 이는 대자보의 의견과 대자보를 붙인 단위에 대한 공격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가 대학에서 일어날 정도로 공론장에 대한 관심이 줄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하기에 안타깝습니다.”
“6월 2일, 7월 5일, 그리고 7월 15일. 세 번의 대자보 훼손과 함께 우리가 마주한 것은, 노동자의 권리를 말하는 목소리의 존재조차 용납하지 못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반박 자보를 게시하는 것도, 다른 형태의 공론장을 통해 주장을 개진하는 것도 아닌 대자보 훼손이 대체 어떤 의미를 남길 수 있을까요. 안타깝게 돌아가신 건설노동자와 청소노동자분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려는 사람들은 대자보를 썼습니다. 노동조합에 대한 공격에 반대하고 권리를 찾기 위한 노동자의 투쟁에 함께하고자 하는 이들은 글로 생각을 전했습니다. 만약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전하고 싶다면, 폭력이 아니라 생각을 보여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