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혜와 박제화를 넘어, 서로와 서로를 잇는 연대로

전태일열사 정신계승 전국노동자대회
서울대 실천단 사전행사 발제문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
― 전태일 (1969년)

1. 서울대학교 학내 노동의 현재와 과제


 지난 문재인 정부의 제1호 공약은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정책이었다.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는 2018년 이 정책을 선제적으로 수행하여 공공기관으로서 의무를 다했음을 자평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기억하고 있듯 실제 학내 노동의 현실은 대학본부의 일방적인 자화자찬과는 매우 거리가 멀었던 것이었다. 본 단체, 비정규직 없는 서울대 만들기 공동행동(이하 비서공) 역시 이러한 정세 속에서 학내 노동자들의 진짜 정규직화를 요구하기 위해 2018년 9월 출범된 것이었다. 서울대학교에서의 ‘비정규직 제로’는 정규직화가 아니라 무기계약직 전환일 뿐이었으며, 그나마도 모두 이루어지지 않았고,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된 이후에도 실제 정규직인 법인직원과의 차별이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다. 차별과 저임금, 과로가 이어지는 가운데, 참혹하게도 두 사람의 청소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세상을 떠났다. 그동안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이 정당하게 제기해온 문제들 중 상당수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

 학교 인프라의 일상적 작동을 위해 유지보수의 최전선에 서 있는 청소・경비・기계・전기・소방・통신・영선 등 시설관리 노동자들은 30년 가까이 용역업체를 통한 비정규직 형태로 고용되어 왔다. 2018년 정규직 전환 정책에 따라 760여 명의 노동자들이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되었으나, 학교는 이들의 처우가 어떻게 달라져야 할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고민이 없었다. 임금은 여전히 최저임금보다 불과 몇백원 높은 수준이었고, 근속연수가 높아져도 저임금에서 벗어나기 힘든 임금체계도 지속되었다. 정규직화 정책과 함께 추진된 노동시간 주52시간제 하에서, 기존의 격일 근무자들의 장시간 노동에 대해 대학은 신규채용을 하거나 초과노동수당을 지급해야 마땅했지만, 대학은 예산 부족을 핑계로 어느 것도 제대로 준비하지 않았다. 2019년 9월, 노동조합에서 문제해결을 촉구하자 협상 자리의 관리자는 “당신들이 뭔데 민주노총이 서울대에서 교섭할 수 있냐, 나가라!”, “특이상황도 없는데 무슨 야간수당을 달라 그러니 뭐도 달라 그러니 이따위 행동을 하느냐” 등의 폭언을 쏟아냈다. 시설관리직의 노동은 학생・교원・노동자 모두를 포함한 학내 구성원의 안위를 지키는 필수 노동임에도, 오로지 예산과 비용의 절감에만 골몰했던 대학본부는 노동자들의 열악한 휴게공간도 제대로 개선하지 않았다. 바로 이러한 태도가 같은 해 8월의 공대 청소노동자 사망 사건의 근본적 원인이었고, 그 태도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기에 2021년 기숙사 청소노동자 사망 사건이라는 또 한차례의 비극이 재발하였던 것이다.

 서울대학교 생활협동조합은 교정 곳곳에 산재한 학생식당과 느티나무 카페, 문방구 및 매점들을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운영해왔다. 그러나 언뜻 듣기에 “협동조합”이라는 형태로 운영되는 공익적이고 민주적인 기관일 것 같은 서울대 생협의 실상은 그와 딴판이다. 협동조합이라면 마땅히 조합원에게 배당이나 수익, 또는 용역을 제공해야 할 것이나, 서울대 생협의 용역 제공처는 모든 학내 구성원이다. 조합원이 된다고 어떠한 수익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서울대 생협에는 기금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은 아예 적자를 보고 있지만, 과거 흑자였을 시절에는 생협 사업에서 발생한 이익을 학교발전기금이라는 명목으로 대학본부에서 수취해 갔다. 서울대 생협은 그 시작부터가 학교 후생과에서 운영하던 학내 복지용역을 형식적으로 별도의 법인인 생협으로 분리해서 만든 것으로서, 사실상 학내복지를 외주화하는 또 하나의 간접고용 용역업체일 뿐이다. 서울대 부총장 및 학생처장이 생협 이사장 및 부이사장을 겸임하고 책임만을 회피하고 있다는 점에서 생협은 대학 내부적으로 기만적인 자회사나 도급 형태의 간접고용 구조를 재생산하고 있다. 이런 구조하에서, 생협은 인력과 인건비 감축을 통해 비용 절감을 시도해왔으며, 생협의 노동자들, 특히 식당과 카페 노동자들은 오랫동안 고강도 저임금 노동에 시달려 왔다. 2019년, 생협 식당・카페 노동자들은 30년 만에 첫 파업에 나섰고, 한때 생협 사무처 건물을 점거하기까지 이르렀다. 이후에도 처우 문제가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못해 2021년 한 차례 더 파업이 있었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아직 요원한 실정이다. 상황이 개선되지 않자 많은 노동자들이 다른 직장을 찾아 떠났고, 인력 부족으로 인해 서비스 품질이 악화하고, 남은 노동자들의 부담은 과중되고, 더 많은 노동자들이 떠나는 악순환이 일어나고 있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대학본부는 지난 5월 간담회에서 “생협은 ‘협동조합’ 이므로 구성원 전체가 협동해서 이겨내자”라는 황당한 발언을 통해, 사태 해결의 의지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사태의 원인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지금도 대학본부는 생협 학생식당에 대한 재정적 책임을 확대하거나 단체급식 사업 등을 직영화하려는 노력도, 이를 통해 생협 노동자들의 처우를 개선해 노동력을 재확보하려는 노력도 보여주지 않고 있다.

 과거 서울대는 공무원들만으로는 부족한 사무를 처리하기 위해 다양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고용했다. 2011년 법인화 당시 공무원들과 기성회직 노동자들은 법인직원으로 전환되었다. 이 법인직원들만이 서울대에서 유일한 제대로 된 의미에서의 정규직이라고 할 수 있다. 나머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2018년 정부의 정규직화 정책과 함께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되었고, 이들을 집합적으로 ‘자체직원’이라고 부른다. 대학 법인에서 고용한 것이 아니라, 각 단과대 및 기관들에서 자체적으로 고용한 직원이라는 뜻이다. 학번이 높은 학부생이나 대학원생들은 2017년 비학생 조교 파업 당시, 학과의 행정사무에 필수적인 핏줄의 역할을 하는, 여느 교수들보다 학과의 일에 밝은 행정실 “선생님”들이 비정규직이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고 놀랐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2018년 이후로도 시설관리 및 생협 노동자들과 같은 맥락에서, 이들 행정사무직 노동자들 역시 정규직 법인직원과 비교해 차별적 대우를 받고 있다. 서울대의 예산 결정 및 집행 권한은 본부가 독점하고 있다. 예하 기관들은 예산이 없어서 노동자들의 처우를 책임질 수 없다고 하고, 본부는 자체직원은 기관들의 책임이라고 떠넘기는 상호적 책임회피만 무한히 반복되는 것이다. 이 모든 문제의 근본적 원인은 대학본부가 노동자들을 직접 고용하지 않는 반쪽짜리 정규직화, 각 기관과 단과대별로 파편화된 이중적 고용구조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력충원을 통한 노동강도 완화 및 노동환경 개선, 임금구조와 복지 차별 해결을 비롯한 처우 개선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생협 직영화를 포함한 모든 학내 노동자들의 대학 법인 직고용, 인사발령 일원화, 진정한 의미의 정규직 전환이 요구되는 것이다.

 하여 2018년 전후로 지금까지 각 직종의 학내 노동자들은 여러 차례 파업을 통해 위와 같은 쟁점들을 제기하고, 대학본부를 상대로 싸우기 위해 학생들에게 협력과 동의를 구했다. 시흥캠퍼스 철회를 위해 본부점거 투쟁을 벌이던 학생사회에 대해 고용 안정을 위해 투쟁하던 비학생조교 노동자들이 연대하는 등, 상호적인 연대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도 있었다. 노동자와 학생 간 연대를 위한 노력이 다양하고 역동적으로 존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운동과 학생사회 간의 연대에 있어서 일정한 아쉬움은 남는다. 2019년 2월 시설노동자 파업 당시처럼 대학이 적극적으로 노동자와 학생의 이해관계가 제로섬 관계인 것처럼 갈라치기를 시도하기도 했고, 여러 국면에서 학생사회가 노동자에 대한 시혜를 넘어선 적극적 지지와 연대를 구축해내지 못하기도 했다. 학생과 직원 모두의 피부에 복지를 통해 직접적으로 와닿는 생협 문제에 있어서도, 식단 부실화가 노동강도의 악화 및 인력 부족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공동으로 생협에 대한 대학의 책임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대학본부를 상대로 노동자와 학생 모두의 권리를 재정적으로 보장하도록 관철해내는 실질적 힘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2. SPC 노동 참사와 서울대학교


 2022년 10월 15일, 제과 재벌 SPC그룹의 계열사인 제조업체 SPL의 평택 공장에서 23세의 여성 노동자가 교반기에 상반신이 빨려 들어가 사망하는 참혹한 산재 사망사고가 일어났다. 해동 공정을 들여놓을 비용이 아까워 냉동된 재료를 교반기의 열과 압력으로 짓눌러 조리해왔기 때문에, 교반기 위의 철망을 제거한 채 돌아가는 기계 속으로 주걱을 넣어 위험한 노동을 해왔다. 2인 1조 근무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기에 기계를 긴급히 정지시킬 수도 없었다. 공장은 사망자를 발생시킨 기계만 흰색 가림막으로 가려놓고, 동료를 잃은 노동자들에게 생산을 계속할 것을 명령했다.

 같은 달 20일, 비서공은 학내 관정도서관의 SPC 매장(파리바게뜨・카페 파스쿠찌), 그리고 SPC그룹이 농대에 지어준 SPC 농생명과학연구동에 SPC그룹을 규탄하는 대자보를 부착했다. 이 대자보는 언론에도 소개되어 상당한 화제가 되었지만, 어떤 과정으로 대자보가 부착된 것인지 소개한 보도는 거의 없었다. 비서공은 그 이전부터 파리바게뜨 노동자 힘내라 공동행동(이하 파리바게뜨 공동행동)에 집행위원들을 대표자로 파견해 투쟁 현황을 공유받고 SPC그룹의 반노동적 행태에 맞선 파리바게뜨 제빵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해 오고 있었다. 10월 20일은 원래 파리바게뜨 공동행동에서 전국의 파리바게뜨 매장 앞 1인 시위를 계획했던 날이었다. 제안받은 계획을 어떻게 실천할지 의논하는 과정에서 참혹한 비보가 날아들었고, 우리의 언어로 SPC그룹을 구체적으로 규탄하는 대자보를 써 붙이자고 결의하게 되었던 것이다.

 서울대 학내 노동 의제에 연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단체인 비서공은 왜 SPC 문제에도 연대했는가? 그것은 단순히 같은 노동 문제라서, 노동에 관심을 갖고 있다면 마땅히 그래야 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은 서울대 학내 노동 문제의 원인이 SPC 계열사들에서 자행되는 반노동적 행태의 원인과 동일하였기 때문이다. 인건비용의 절감을 통한 이윤의 확대만을 추구하고, 쉬지 못하고 일하는 노동자들을 직업병으로 몰아넣고, 이러한 부당함에 저항하는 노동조합의 대표성을 업신여기고, 끝내는 노동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그 모든 행태가 같았다. 서울대가 SPC였고, SPC가 서울대였다. 이러한 유사성은 관념적인 차원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SPC의 식품공장의 위험하고 불안전한 시설은 서울대 학생식당 노동자들의 그것이었고, 휴게 시간을 보장받지 못하는 제빵사들의 모습은 서울대 시설관리 노동자들의 그것이었다. 모든 현장과 노동은 현실 속에서 실제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서울대학교는 유독 SPC그룹과 끈끈한 유착관계를 가지고 있다. 농대에 SPC연구동이 세워지고, 해당 건물에는 SPC 허영인 회장의 이름이 붙은 세미나실 강당이 있으며, 5층에는 SPC 사내연구소가 입주해 있다. 서울대학교는 2011년 SPC그룹과 손잡고 낙농기업 “에스데어리푸드”를 설립했다. 지분의 50%를 SPC의 지주회사 파리크라상이 소유하고 있는 이 회사는 서울대학교 기술지주회사의 자회사이기도 하며, 서울대학교 로고 심벌을 브랜딩한 제품들을 제조해서 파리바게뜨를 비롯한 소매 담당 계열사에 납품하고 있다. 자연히 SPC 계열사의 수익 중 일부가 지분구조를 타고 흘러 서울대학교의 수익으로 배당되는 것이며, 학교는 그 수익을 학교와 학생에게 재투자할 것이다. SPC 허영인 회장은 산학협력을 비롯한 이러저러한 대가를 이유로 2008년 제1회 서울대학교 발전공로상을 수상하기까지 했다. 평택공장의 참혹한 죽음 앞에서 서울대학교 구성원 누구도 SPC그룹과 관련된 책임윤리에서 자유롭지 않다. SPC그룹이 자신의 반노동적 행태를 서울대의 브랜드 가치를 통해 은폐해온 구체적 현실에서 나온 책임윤리는, “서울대학교 학생 된 사회적 책임” 같은 엘리트주의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누군가는 불매를 강요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기도 했고, 혹자는 불매를 하면 기업이 아니라 “애꿎은” 가맹점주들만 피해를 본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중적 분노로 강고히 유지된 불매운동과 시민들의 연대로 힘을 얻은 노동자 운동 앞에 SPC그룹은 한발 물러섰다. 지난 11월 3일, 화섬식품노조 파리바게뜨지회는 마침내 파기바게뜨 사측과 노사협약서를 체결했다. 물론 이것은 앞으로 이어져야 할 변화의 시작일 뿐이다. 사회적 합의를 헌신짝처럼 져버린 SPC그룹의 지난 행적을 생각해 볼 때, 사측이 과연 이번 합의를 성실하게 이행할지 의구심을 떨칠 수 없을뿐더러, SPL 공장 참사의 재발 방지를 위한 구체적 대책도 충분히 마련되지 않은 상황이다. 향후에도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적용을 비롯하여 SPC그룹의 안전한 노동환경 보장을 위한 요구들을 이어나가고, 서울대학교와 SPC그룹 간의 유착관계가 지속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대학에도 문제 제기를 이어나가야 할 것이다.

3.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의 의미


 SPL 공장 참사의 사망 피해자는 향년 23세.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사망한 김용균 열사는 향년 24세였다. 향년 22세로 세상을 떠난 전태일 열사와 동년배의 산재 희생자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근래 몇 년 사이,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 전국노동자대회 때마다 등장하는 “백만의 전태일”, “우리가 전태일이다”, “전태일은 살아 있다” 등의 구호들이 더욱 무겁게 다가온다. 그렇다면 우리가 계승할 수 있고 또 계승해야 할 전태일 열사 정신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을 재확인하기 위해 우리는 조영래 변호사가 기록한 『전태일 평전 -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다시 꺼내 읽어볼 필요가 있겠다.

 『전태일 평전』은 인간 전태일에 대한 공식적 기억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어서 하나의 이정표였고, 그 가치를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책은 이제 비판적 계승의 대상이기도 하다. 저자 조영래 스스로 인정했듯이, 『전태일 평전』은 지식인의 관점에서 쓰인 책이고, 이에 따라 다양한 한계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전태일 평전』 속의 세계에는 전태일 이외의 존재자들이 희미한 배경으로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노동조합을 조직한 동지 재단사들은 모두 가명으로 처리되어 있다. 전태일이 ‘보호’하고자 했던 대상, “착하고 깨끗한 동심”들이라고 지칭되는 ‘여공’들은 아예 이름이 없다. 그들은 전태일 본인이 남긴 기록물들에서도, 그것을 지식인 조영래가 한 번 걸러서 서술한 평전에서도 불쌍한 여공들이라고 집합적으로 지칭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전태일을, 전태일의 죽음에 부끄러워 결합한 지식인들의 이름을 알지만, 그들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지금에 이르러 전태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재단사의 길을 기꺼이 포기하고 불쌍한 ‘여공’들을 위해 몸을 내던져 희생한 성자의 이미지로 그를 기억하지 않는가? 그런 기억들 역시 틀린 기억은 아닐 것이다. 투명한 수정에 여러 면이 있어서 비쳐 보이는 각도에 따라 그 너머가 달리 보이듯이, 그 기억 역시 열사를 재구성하는 여러 기억들 중 한 면인 것이다. 그러나 전태일 열사가 오직 그 한 측면의 이미지로서만 기억된다면, 인간 전태일, 그리고 그가 함께 만들어나간 대중운동의 여러 측면들이 소거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전태일 평전』이 만들어내고 우리가 기억하게 된 전태일은 역사적으로 완성된 이미지로서의 전태일이지만, 동시에 평면적으로 박제된 전태일이기도 하다. 지식인의 관점에서 박제된 전태일의 이야기는 두 차례 영상화되었다. 실사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년)과 만화영화 『태일이』(2021년)가 바로 그것이다. 이 영화들이 이루어낸 예술적 및 대중적 성취는 인정되어야 하지만, 이런 영상물들에 이르면 전태일은 완전히 “아름다운” 성자의 이미지로 신화화되고 만다. 전태일이라는 인물은 압축적 경제발전과 초과착취를 통한 축적이라는 역사적 현실의 와중에 현대 한국에서 노동자계급이 출현하고 대중운동이 형성되는 과정 속에 놓여 있었지만, 개인의 숭고한 결단만이 영웅화되어 강조되면 이러한 맥락은 지워지고 만다.

 하지만 『전태일 평전』이라는 수정체를 통과해서 보이는 전태일의 모습은 이런 일면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수정체의 각도를 약간만 돌리면 이와는 전혀 다른 모습들의 단초가 보인다. 조영래가 규정한 바, 전태일의 노동운동은 네 단계에 걸쳐 변화했다. 제1은 자신이 재단사로서의 지위를 이용해 ‘여공’들을 돌보아주는 “온정주의”였다. 제2는 기업주와 당국에 시정을 호소하는 “진정주의”였다. 제3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회사를 몸소 설립하고자 하는 “공상적”인 것이었다. 제4는 노동자들을 억압하는 제도와 현실에 맞서는 “적극투쟁주의”였다. 전태일의 노선은 왜 이렇게 변화했는가? 특히, 이 중에서 제1단계는 탈역사화되고 박제된 전태일의 이미지가 표상하는 온정적 시혜로서 그 이후의 단계들과 질적으로 구분되는 것인데, 그는 어떻게 이 제1단계를 벗어나 다음 단계들로 이행하게 되었던 것인가?

 다른 무엇보다 컸던 요인은, 전태일이 재단사라는 자신의 위치가 ‘여공’들에 비해 우월한 것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었다. 전태일의 유고를 보면 그가 재단사 역시 ‘여공’들과 마찬가지로 착취 관계 속에 놓인 노동자이며 재단사로서의 지위를 통해 다른 노동자들에게 시혜를 베푸는 것이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아프게 실감했음을 느낄 수 있다. 당시 ‘여공’들이 하루 13~16시간의 노동에 시달린 것은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재단사 전태일의 노동 조건은 어떠했는가? 평화시장 노동실태 조사를 위해 그가 제작하고 돌린 설문 조사에서 그 자신의 답변내용부터 살펴보자. 전태일이 가진 휴가는 한 달에 2일. 노동시간은 매일 오전 8시부터 오후 10시까지, 14시간이었다. 취미는 “독서”라고 적었지만 교양을 위한 서적은 “C. 볼 시간이 없다.”, 직업병의 경우에도 폐결핵과 심장병을 제외한 모든 선택지를 체크하고 있다. 한 달 임금은 2만 3천 원이었다. 남성 숙련공이라 임금을 더 받기는 했지만, 여하의 노동환경에서 그는 “보호의 대상”으로 그가 이전에 간주했던 여성 비숙련공들과 큰 차이가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의 희생은 물론 숭고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과 아무런 이해도 공유하지 않을 ‘남’들을 위한 아름다운 희생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와 정반대로, ‘여공’들이 자신이 일방적으로 도와줄 대상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처지를 공유하고 있는 존재들임을 인식했을 때, 즉 그들의 해방이 자신의 해방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음을 인식했을 때, 그는 이 ‘해방’을 위해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그는 왜 행동하지 않을 수 없었던가? 그것은 모든 인간이 서로서로가 서로서로의 전체의 일부였기 때문이었다. …… 이것이 그 혼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인간으로서의 존립조건임을 그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행동의 사상은 고독한 행동의 사상이 아니다. 그것은 …… 우리 모두를 행동으로 불러내는, 우리 모두로 하여금 행동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만드는 연대행동의 사상이다.”
― 『평전』: pp. 159-160

 우리가 계승해야 할 전태일 열사 정신의 단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전태일의 삶과 투쟁을 오늘날의 우리가 정당하게 평가하고 이에 조응하기 위해서는, 그 삶을 1970년의 한순간에 박제된 사실(史實)로서가 아니라, 1970년대부터 오늘날 2020년대까지 이어져 온 노동과 투쟁에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는 현재로서 사고해야 할 필요가 있다.

4.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고, 연결되어야 한다


 조영래를 비롯한 전태일 당대의 대학생・지식인들이 전태일이 남기고 간 투쟁에 함께 결합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는가? “대학생 친구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좋겠다”는 그 생전의 절규가 그들의 죄책감을 자극했기 때문인가? 그런 측면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죄책감만으로 이루어지는 싸움은 건전하지도 않고 지속가능하지도 않다는 것을 우리는 여러 역사적 사례를 통해 잘 알고 있다. 그들이 그렇게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전태일의 삶과 투쟁을 구성하는 여러 측면 가운데서, 자신들이 추구하던 민주화운동 및 학생운동과 결부되고 조응되는 지점들을 발견하고 거기에 결합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에 이르러서 왜 당시의 연대가 많은 경우 형해화되었는지, 전태일의 뜻을 잇겠다고 나섰던 “대학생 친구”들 중 상당수가 지금은 전태일의 길에 서 있지 않은지 역시 이해할 수 있다. 어느 시점 이후로 그들은 전태일과 결부되기에 실패한 것이다.

“나를 도우러 온 것이라면 시간낭비 하셨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해방이 나의 해방과 긴밀히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온 것이라면, 그렇다면 함께 일해 봅시다.”
― 릴라 왓슨 (1985년)

 진정한 연대의 의미에 대해 고민이 깊어지는 지금, 호주 원주민 운동가 왓슨의 이 말은 진정한 연대의 의미와 조건이 무엇인지 일깨워주는 금언이라 할 것이다. 이는 단순히 직접적으로 이해관계를 공유해야만 진정성 있는 연대가 가능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상호 간에 결부된 관계를 발견하고, 없으면 그러한 관계의 지점들을 만들어가는 것이 연대를 조직화하는 과정이라는 중요한 통찰을 내포하고 있다. 오늘날 사회 각 분야 사이의 연대가 형해화되어가고 있다면, 그 이유는 바로 이 결부됨을 만들어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전태일 열사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실천할 수 있는 방향성의 단서는 여기에 있다. 선심・시혜・동정・배려의 대상이 아니라, 그들의 해방이 나의 해방이고 우리 모두의 해방인 이유를 찾고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서울대학교 학생으로서 우리는 학내 노동자들과 연결되어 있고, 마찬가지로 서울대학교 노동자들도 우리 학우들과 연결되어 있다. 대학이라는 공동체 내의 의사결정에서 소외되고 대학본부의 비용 절감 속에서 처우와 복지의 후퇴를 겪는 노동자와 학생들은, 분명 결부된 접점들을 지니고 있고 또 그렇기에 공동의 목소리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 서울대학교 노동자들은 노동조건의 현실 속에서 SPC 노동자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관악구 주민인 많은 학생과 노동자들은 지난 8월 기후재난 수해로 세상을 떠난 주거 빈곤 노동자와 연결되어 있다. 얼마 전 11월 2일에는 SPL 공장에서와 흡사한 모습으로 농심 라면공장에서 끼임 사고가 발생했다. SPL 사고와 마찬가지로 2인 1조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위험천만한 사고였다. 안전한 작업환경을 위한 인력충원의 미비, 그리고 작업중지권을 비롯하여 근무자의 현장 통제 권한이 묵살되는 현실이라는 지점에서 SPL 사고와 태안화력 사고도 유사성을 보이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많은 산업재해 사건들 또한 연결의 지점들을 지니고 있다. 우리의 현실이 연결되어 있는 만큼, 더는 일하다 죽거나 다치지 않는 노동조건을 만들어내기 위한 우리의 움직임도 연결될 수 있고 또 연결되어야 할 것이다. 시혜를 넘어서 동등한 관계에서 연결성을 찾고 서로의 해방을 위해 노력하는 연대, 그런 연대가 향후 학내 노동 의제를 비롯하여 학내외로 함께 확장적 움직임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기초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