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O기본협약과 사회구성원의 권리행동은 어떻게 이어져있나’ 토론회 발제문

‘비정규직 없는 서울대 만들기 공동행동’에게 토론의 기회를 주신 불안정노동철폐연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희는 작년 초에 출범하여 대학 내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활동해오고 있는 학생들과 학내 노동조합의 공동투쟁기구(연대체)입니다. 현재 약 20개의 서울대 학생회/학생단체가 가맹된 네트워크 형식의 조직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노동자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에요, 대학생이 말하는 비정규직 철폐!
특기할 만한 점은 ‘비정규직 없는 서울대 만들기 공동행동’(이하 비서공)이라는 연대체 구성을 처음 제안한 것이 현장 노동조합이 아니라 학생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구성을 고안하고 노동조합에 제안함으로써 출범계획이 현실화되었고, 출범 이후 사업계획도 대부분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혹자는 왜 학생들이 자기 문제도 아닌 학내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먼저 발 벗고 나섰는지 궁금해 합니다. 작년(2018년) 3월 15일, 우리는 대학 내 비정규직 철폐를 향한 첫발을 내딛으며 기자회견을 통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긴 출범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우리는 무한경쟁과 차별, 소외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태어난 우리는 입시경쟁의 학창시절을 거치고 취업공장인 대학을 지나, 내 것이 아닌 나라의 ‘근로자’가 되기까지 평생을 쫓기듯 숨 막히게 살아갑니다. 우리는 평생 ‘경쟁에서 지는 것은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그래서 경쟁의 패자를 차별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대학생이 된 우리는 학점이 낮고 스펙이 부족하면 언제 경쟁에서 도태되고 ‘비정규직’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에 스스로를 채찍질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동료를 짓밟으라고 명령하는 무한경쟁과 차별의 논리는 정말로 그저 당연한 것입니까? 경쟁은 우리의 존엄한 삶과 행복을 보장해주나요? 언제 경쟁에서 낙오될지 모르고, 대학에서의 성적이 곧 노동시장에서의 ‘비정규직’과 ‘정규직’,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별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지금 여기, 우리의 행복을 앗아가고 있습니다.
이는 “왜 대학생이 대학 내 비정규직 철폐를 요구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우리의 답변입니다. 당장 비정규직 문제는 대학생들의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비정규직 문제, 불안정 노동의 문제야말로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문제이며, 대학생들이 피해갈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체제는 노동자를 정규직, 비정규직으로 분할하여 차별하고, 모든 노동자가 마땅히 누려야 할 기본적 권리를 경쟁에서 이겨야만 얻을 수 있는 일종의 ‘보상물’로 둔갑시켜 우리로 하여금 경쟁과 이에 따른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도록 만듭니다.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임금과 노동조건을 낮추는 것은 사용자의 이윤을 위해 행하는 부당한 처사인데, 우리는 이 차별을 당하는 과정에서 무기력해지고 경쟁에서 승리해 이 차별로부터 탈피할 책임을 우리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합니다.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그 지독한 능력주의의 이데올로기, 차별과 경쟁의 메커니즘은 바로 우리 대학생들을 평생 옥죄어 온 사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 자체를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체제가 작동하는 원리를, 우리를 무력화하여 길들이는 방식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수많은 대학에서 학생들이 행하는 교육투쟁이 비정규직 철폐투쟁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고, 대학에서 비정규직 철폐의 깃발을 내걸 수 있었습니다. 이는 ILO협약 비준에 대해서도 누구나 누려야 할 기본권의 관점에서 비슷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학에서 만들어 온 비정규직 철폐 운동의 특징과 난점, 시사점 - 서울대 중앙도서관 난방 파업 사건을 중심으로
앞서 살펴보았듯 대학생 주체로서 비정규직 문제를 바라보는 것은 당사자적인 동시에 이데올로기적입니다. 우리는 비정규직 철폐를 이야기하기 위해 평생을 경쟁에 시달려왔고 시달리고 있는 신자유주의 속의 대학생이라는 존재를 소환해냈지만, 그 대학생이 비정규직 문제와 만나는 지점은 결국 ‘세계가 바뀌어야 나의 삶도 바뀐다’는, 해방의 이데올로기를 길어올림으로써 가능해집니다.
민중적 지식인으로 규정되었던 대학생들의 과거와 달리, 비서공은 체제의 모순을 직접 경험하고 이에 저항하는 대학생들에게 연대하여 저항하는 가능성을 제시하겠다며 ‘새로운 (대학) 노학연대’를 이야기했지만, 결국 우리도 비슷한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위적으로야 우리는 동지이지만, 표면적으로 학생과 노동자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듯 보이는 상황에서 우리는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이것이 가장 대표적으로 드러난 사례를 올해 초 발생한 민주노총 서울일반노조 서울대기계전기분회의 ‘중앙도서관 난방 파업’ 투쟁으로 꼽을 수 있겠습니다.
수십 년 간 용역업체를 통해 간접 고용 되어왔던 기계전기설비 노동자들이 ‘전원 정규직화’되었다는 학교의 홍보에도 불구, 처우는 그대로이거나 오히려 악화되어 ‘최저임금이 아닌 생활임금’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습니다. 이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가자 중앙도서관 난방이 꺼졌는데, 학생들의 비판 여론이 거셌습니다. 총학생회도 곧바로 노조에 중앙도서관 파업 중단을 요구하겠다고 입장을 발표하며 갈등이 커져 갔는데요.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지하는 학생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 구성을 제안한 비서공의 고민도 깊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학생 다수가 반대하는 상황에서 파업을 지지하자, 노동자들과 함께하자고만 외친다고 해결이 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을 겪으며 저희 비서공의 구성원들은 현실의 관계 위에서 연대를 구성해 나가는데 생각보다 더 많은 정치적 고민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찌되었든 학생들이 주축이 되는 단체이다보니 노동조합과는 이런 점에서 해야 할 역할, 요구받는 역할이 다를 수밖에 없지요. 당시에 가장 많이 들었던 비판이 학생이라면서 대체 어떻게 학생들 고통스러운 걸 이렇게 몰라줄 수 있느냐, 학생이라는 이름 달고 노동자만 지지하는 게 말이 되냐, 서울대 학생 대표한다는 듯 행동하지 말라, 학생의 이익에 반한다 등이었습니다. 비서공 중심의 공대위는 원칙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파업이 왜 일어났는지, 파업을 이미 예측하고 있었던 학교가 학생들의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지도, 학생들에게 공지를 하지도 않은 것이 얼마나 무책임한지, 학교 측의 교섭 해태 끝에 노조가 쟁의권을 얻게 된 배경이 어땠는지 등을 최대한 자세히 선전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러는 한편, 파업이 일찍 종료되기 위해서라도 (학교 측이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파업을 강제로 종료시키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면) 우리가 노동조합 측에 힘을 실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리며, 학생회 대표자들과 밤샘 토론을 했고, 조금씩 설득되어가는 학생들을 가시화하기 위해 SNS 릴레이를 이어가며 파업 지지의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결국 토론 끝에 총학생회도 파업 지지로 입장을 선회했고, 곧이어 노동자들의 승리로 파업도 종료되었습니다.
이 파업의 경과는 우리에게 세 가지 시사점을 남겼습니다. 첫째, 생각보다 시민/학생 일반은 파업이 발생하는 과정과 노동기본권으로서의 파업권에 대해 잘 모르며, 접할 기회가 없습니다. 그저 노조가 벌이는 수많은 시위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현재 ILO나 경사노위 투쟁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점이 많습니다. 노동기본권 문제는 너무도 알려져 있지 못하기에, 노동계 외부와의 연대 건설을 위해 생각보다 교육, 선전의 역할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일상적 노동자-학생 연대, 학내 노동문제 가시화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노학연대의 전통이 유실되며 학생과 노동자 사이에 공동 활동의 경험이 축적될 기회가 없다보니, 학생을 당사자로 끌어들이게 되는 파업까지 가는 과정에서 양 주체가 머리를 맞댈 기회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셋째, 가장 중요한 시사점은 노동자 뿐 아니라 학생, 시민 등 다양한 주체가 노동문제를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평소 노동문제에 대해 학습하고 활동하는 학생들(비서공 뿐 아니라 당시 공대위에 참여했던 학생단체 및 학생들)이 없었다면, 아마 서울대 학생들이 토론 끝에 파업 지지를 결정하리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학생들이 단순히 노동자들의 활동을 지지하고 보족한다는 과정에서만이 아니라, 스스로 학생 사회 내부의 정치적 담론을 생산하고 확산한다는 자기정치영역에 대한 확고한 목표와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모든 공간에서 모이고 말하고 행동하는 정치를!
학생들 역시도 모이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익숙치 않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ILO 투쟁은 노동자들의 조직하고 행동할 권리에 관한 투쟁이지요. 조금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저는 각자의 공간에서 말하고 싸우고 조직하고 행동해보는 경험이 많은 사회구성원들로 하여금 이 투쟁의 우군으로 거듭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대중공간에서 공동체적인 대중투쟁을 조직해야 합니다. 모이고 말하고 행동하는 경험이 많아져야 하고, 당연해져야 합니다. 동시에, 노동기본권의 문제가, 비정규직의 문제가, 권리를 희생하라고 요구하는 체제에 맞서는 문제가 곧 우리 모두의 문제임을 해석하고 주장하는 시민단체, 학생단체들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긴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