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성명: 중앙도서관장 서이종 교수님께 드리는 말씀
노동 없는 대학은 없습니다
얼마 전 서울대 기계전기 직종 노동자들이 파업을 해 중앙도서관 난방 공급이 중단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장을 맡고 계시는 사회학과 서이종 교수님께서는 ‘도서관과 연구실의 난방마저 볼모로 임금 투쟁하는 이번 서울대 파업은 우리 사회의 이런 금기마저 짓밟는 초유의 사건’ 이라며 조선일보에 파업을 비판하는 기고를 작성하셨습니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병원 파업에서 응급실을 폐쇄해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행위는 금기이듯이, 대학 파업에서도 우리 공동체를 이끌 미래 인재들의 공부와 연구를 직접 방해하는 행위는 금기”라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이미 사회 각계에서 교수님의 의견이 지나치게 편파적이고 우리 사회 권력 구조를 은폐한다는 비판이 제기된 바 있으나, 노동자들과 연대해온 저희 학생들도 이에 대한 입장을 밝힐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여 짧게나마 의견을 밝히고자 합니다. 저희들은 이 글을 빌어 서이종 교수님께 다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학습과 연구에 영향을 주지 않는 파업이란 대학에서 불가능합니다.
교수님께서 운영하시는 중앙도서관에 매일 난방이 들어오고 전기가 공급되는 것은 누군가가 그 일을 밤낮으로 도맡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파업은 그 노동자들이 일손을 내려놓았을 때,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학교의 학습·연구시설이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없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대학이란 곳은 본디 학습과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곳이기 때문에, 대학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하는 파업은 필연적으로 학습과 연구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교수님께서 “미래 인재들의 공부와 연구를 직접 방해”했다는 이유로 이번 파업을 비판하시는 것이라면, 이는 대학에서 파업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도서관이 대학에서 중요한 기관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겠지만, 과연 대학에 중요하지 않은 공간이 어디 있을까요? 모든 대학의 기관이 누군가에게는 학습과 연구의 터입니다. 바로 이 지점 때문에 교수님의 주장이 파업권 자체를 부정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교수님의 주장을 따르려면 대학에서 아예 파업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파업까지 하게 된 이유를 빼놓고 노동자들의 파업만을 비난하는 것은 편파적이고 부당합니다.
노동자들이 파업에 이르게 된 것은 그동안 서울대가 노동을 천시해왔기 때문입니다. 우리 대학은 지금까지 그들을 투명인간 취급해 왔습니다. 몇십년을 일해도 최저임금 노동자인 것이 당연했습니다. 심지어 얼마 전 기자간담회를 통해 신임 오세정 총장님도 ‘노동자들의 처우가 너무 열악했던 것은 사실’이라고 꼬집으셨습니다. 기계전기 노동자들은 학교와 십수차례의 교섭에도 불구하고 학교가 이들의 처우 개선에 대한 의지를 보이지 않자, 비로소 지방노동위원회로부터 합법적인 파업권을 받게 된 것입니다.
상황이 이런데 대학 운영, 도서관 운영에 필수적 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을 천시해온 대학의 잘못을 이야기하지 않고, 파업한 노동자들만을 비난하는 글을 신문에 싣는 것은 편파적이며 학자적이지 못한 일입니다. 노동자들의 편을 드실 수는 없더라도, 파업이 나쁘다고만 말하기 전에 노동자들이 파업에까지 이르게 된 맥락과 이유는 공정하게 서술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교수님의 기고문을 읽는 학생들과 국민들에게 사안을 총체적으로 보고 판단할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진정 ‘교육자적’인 태도입니다. 더군다나 중앙도서관장이신 교수님께서 이 노동자들의 실질적 ‘사용자’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활동을 ‘사회악’이라고 칭한 발언을 비판 없이 그대로 칼럼에 인용하신 것은 매우 부적절합니다.
셋째, 파업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신다면, 학자로서 우리나라의 척박한 노동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목소리도 함께 내주십시오.
교수님께서는 조선일보 기고문을 통해 “우리 사회는 천정부지 높아가는 집값으로 꽃다운 젊은이들이 연애도 결혼도 자녀도 포기한 지 오래고, 날로 악화하는 청년 실업 속에서 서울대 학생조차도 취업 준비로 밤낮을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 냉혹한 현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회 속에서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노동자들이 파업조차 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을 수 있을까요? 아무리 파업이 불편을 야기하더라도, 그것을 헌법적 권리로 보장하는 이유는 자본과 노동이라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조금이나마 보정하기 위함입니다.
사회학을 공부하신 선생님께서는 우리 사회가 보이지 않는 권력관계에 의해 조직되어있고,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서 자본이 권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교수님께서는 “사회학적 상식”에 어긋난다며 파업을 비판하셨습니다. 저희는 묻고 싶습니다.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사회학적 상식의 내용은 과연 무엇입니까?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이 지금처럼 살라는 것입니까? 저희는 노동자가 지금처럼 살면서 아무 행동도 할 수 없는 사회야말로 ‘사회학적 상식’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학생들의 청년 실업을 걱정하신다면 교수님께서 “헬조선”이라고 표현하신 우리나라의 척박한 노동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목소리도 함께 내주십시오. 저희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입니다.